(1)칼과 톱
입동(立冬). 겨울의 시작이라는 신호다. 이미 영하가 된 곳도, 달라진 외투의 두께도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현실의 오차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듯 선언이 모든 걸 장악하기도 한다. 이전 계절과의 단절을 이제 받아들이라는 마지막 요구다.
목공 작업을 하다 보면 수공구를 다룰 일이 많이 생긴다. 힘과 시간을 절약해주는 전동공구가 해줄 일이 있고, 작고 섬세한 작업을 해줄 수공구가 필요한 때도 있다. 막손인 나는 톱질 잘하는 사람을 보면 자주 부럽다. 힘의 균형을 맞추고 면을 매끄럽게 자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힘이 분산되거나 방향이 조금만 잘못 들어가면 선은 길을 잃고 만다. 필요하지만 어려운 도구다.
모든 도구에는 적당한 쓰임새가 있다. 무른 재료에는 칼을, 단단한 재료에는 톱을 써야 한다. 무른 재료에 톱을 쓰면 재료는 깨끗하게 잘려나가지 않고 뭉개지고 부서질 뿐이다. 단단한 재료에 칼을 넣으면 한 번에 자르기도, 다음 동작을 하기도 힘들게 된다. 비집고 들어간 틈에 끼어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칼은 하나의 날이, 톱은 여러 개의 날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단번에 자르지 못한다면 칼은 의미를 잃고 만다. 대신 톱은 단번에 끝내지는 못하지만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목적을 이루게 해 준다.
칼이 잘라놓은 재료는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된다. 야채를 썰고 종이를 자르면 그 형태로 목적에 맞게 쓰면 된다. 톱이 잘라놓은 재료는 그것 자체로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목적의 수단, 혹은 전제가 되기도 한다. 자른 나무로 잇고 끼워 새로운 모양의 물건을 탄생시킨다. 어쩌면 톱은 대부분 최종 목적을 위한 과정을 위해 쓰인다. 인류 문명의 확산은 아마 톱으로 더 활발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용도에 따른 쓰임의 차이는 톱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영어로 톱(saw)은 절단하다(cut)는 의미에 기원을 두고 있다. 목재를 절단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뉘고, 사용되는 도구도 두 형태로 구별된다. 나무가 플라스틱이나 쇠처럼 동일한 짜임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복잡한 형태로 얽힌 탓이다. 그래서 켜야 할 때는 켜는(rip-cut) 톱으로, 잘라야 할 때는 자르는(cross-cut) 톱을 사용한다. 립(rip)이 찢는다는 뜻을 내포하듯 켜는 톱은 목재의 섬유질 방향대로 뜯어내듯 절단한다. 반대로 자르는 톱은 섬유질의 직각 방향으로 나무를 절단한다. 날의 각도와 날의 모양이 차이가 나는 이유가 여기에서 생긴다.
톱이 칼과 달리 여러 개의 날을 가진 이유는 절단하는 재료에 끼지 않고 용이하게 움직이게 하기 위함이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톱밥을 원활하게 배출해야 되는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날은 오른쪽 왼쪽으로 엇갈리며 기울어져 있다. 전문용어로는 날어김이라 부른다. 그런데 칼이 지나간 자국이 칼의 두께만큼 그 폭을 가지는 것에 비해, 톱은 톱날의 두께보다 지나간 폭이 더 넓게 남는다. 날의 두께보다 날어김의 폭이 더 넓기 때문이다.(목재에 작고 튀어나온 부분을 잘라내는 용도로 쓰이는 플러그톱은 재료에 상처를 주지 않고 톱밥 배출도 크게 필요 없어 날어김이 없다) 날어김이 크면 톱길을 수정하거나 톱밥 배출은 용이하지만 직선 작업은 어렵다. 대신 날어김이 작으면 톱질 폭이 작아 정밀가공이 가능하지만 톱날이 부재에 끼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목공 도구로서 칼이 덜어내 모양을 갖추는 것에서 멈춰 선다면, 톱은 잘라냄으로 그다음의 행보를 위한 준비를 마치게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헤어진다. 삶은 끝없는 단절의 한없는 연장이다. 단번에 끊어지는 순간도 있지만 서서히 오래도록 덜어내야 하는 시간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자를 수 있느냐고 원망하기도 하지만 어떤 삶은 매끄럽게 자르지 않아 오래도록 고통받기도 한다. 과거와 얼마나 아름답게 결별하는 가에 따라 내일의 발걸음이 달라지기도 한다. 어쩌면 삶은 칼보다 톱을 더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단숨에 잘라낼 수 없어서, 힘겹지만 참아내야 하는 순간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다만 켜는 톱처럼 결방향대로 많이 아프지 않고 덜어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겨울의 초입, 멈춰 서지 않고 이어갈 날을 준비하는 톱의 마음으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