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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Mar 16. 2021

넘치지 않게, 그러나 성실히

(3)사포

   

학문을 연마(硏磨)한다는 말을 쓴다.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학위를 목적으로 공부를 하지는 않았고, 연마한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크게 느끼며 살지는 않았다. 두 한자 모두 무엇인가를 갈아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언제까지 갈아야 할까. 학문을 연마하는 일에 끝이 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품었는데, 그동안 공방에서 사포질을 해보고서야 연마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난한 일인가 알게 되었다.     



연마 도구의 하나인 사포(sand paper, coasted abrasive)는 유연한 물질의 뒷면에 탄화규소 등의 연마 입자를 붙여놓은 것이다. 13세기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 공방에서는 보통 천과 종이로 된 사포를 쓴다. 사포의 거칠기, 입도는 숫자로 표기하는데 숫자 뒤에 흔히 방이라는 용어를 붙여 부른다. 영문으로 입도가 ‘grit’인데 왜 방이라고 부르는지 그 연원은 잘 모르겠다.    

  

입도는 일정한 단위 면적당 입자의 수를 말한다. 우리가 디지털 카메라의 화소수를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동일한 단위 면적에 얼마나 많은 입자가 있는지를 알려준다. 자연히 숫자가 적다는 것은 그 면적을 굵은 입자로 모두 채웠다는 것이고, 숫자가 많을수록 동일한 면적을 채우기 위해 더 작은 알갱이가 들어있다는 뜻이 된다. 작은 알갱이 여러 개가 훨씬 곱게 표면을 부드럽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포질은 60~120방 정도로 시작해서 800방 정도에서 마무리된다. 1000방이 넘어가는 숫자들은 칠을 진행하면서 중간 중간 나무가 뿜어내는 오일을 다시 다듬어 주기 위한 용도이거나, 거친 면을 다듬는다기보다는 윤을 내야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그냥 맨손으로 접어서 사용하기보다는 자투리 나무나 물렁물렁한 재질의 사각형 블록에 사포를 감아서 진행하는 것이 표면에 힘이 고르게 전달되어 표면이 패이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 물론 아주 좁은 부분에서는 접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조그마한 액세서리 정도야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지만 탁자같은 것을 모두 사포질을 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구석구석 사람 손이 가는 곳은 어느 곳이든 사포질을 해야 하고, 거칠기를 달리 하며 3단계 정도는 사포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팔도 아프고 게으름이 생긴다. 물론 완성도를 얼마나 높이느냐에 달려있다. 마당에 두고 쓰는 물건이 아니라면 꼼꼼하게 사포질이 된 것은 칠이 잘 먹고 그 결과물도 좋다.     


그렇다고 사포질이 능사만은 아니다. 그라인딩의 위험이 사포질에도 여전히 도사린다. 모서리는 일정한 크기의 힘을 적당히 주지 않으면 지나치게 뭉툭한 모양이 되어버리거나 균형이 잡히지 않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거친 표면을 없애지만 표면을 패이게 할 수도 있다. 들인 힘의 크기와 노력만큼 돌려받는 것도 동일하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고, 얻으려면 그만큼 흘려버려야 할 것도 있다. 표면이나 모서리에 상처입지 않게 한다고 무작정 연마하다가는 날렵한 선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연마한다는 것, 갈아낸다는 것은 대상물의 표면만 매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긴 시간 동안 어루만지며 꼼꼼하게 정리하라는 뜻일 것이다. 대상이 나무이든 학문이든, 갈고 닦는 일은 다듬되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만드는 일, 그래서 참 어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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