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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Oct 06. 2021

현실을 잠시 잊는 달콤한 이름

바람의 아들 '벤 리에'

한때 시칠리아에 가고 싶었다. 오디세우스가 괴물 키클롭스와 싸우는 <오디세이아> 배경   곳이었고, 꼬마 토토가 <시네마 천국>에서 맑은 눈망울로 뛰어다니던 곳이어서 아마 그랬을 것이다. 시칠리아는 이민족 침입의 과거로 점철된 곳이다.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에는 반달족, () 고트족, 아랍족,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했다. 1947년에야 통일 이탈리아에서 지방자치권을 얻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인 에트나 산은 그런 고단함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희망은 그저 바람으로 끝나지 싶다.     

 

다시 시칠리아를 떠올린 건 제 돈으로는 선뜻 사기 힘든 가격(내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의 시칠리아산 와인을 선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디저트 와인.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디저트를 즐기지 않는다. 와인을 접하고 디저트 와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의아했다. 디저트로 와인을 먹는 것도, 그 와인이 달콤한 와인인 것도 잘 이해가지 않았다. 디저트가 식사를 마무리하며 입안을 정리하게 먹듯, 디저트 와인도 보통은 식후에 마셔 입안을 달콤하고 개운하게 정리하여 식사를 마무리하기 위함이라는데 오래전 같은 이름의 와인을 마셔보고 그 말이 이해되었다.     



와이너리 돈나푸가타가 만드는 벤 리에는 모스카토(Moscato) 포도로 만든 디저트 와인이다. 모스카토 품종은 시칠리아에서 네로 다볼라(Nero D'Avola)와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품종이다. 우리는 쉽게 모스카토라고 부르지만, 모스카토는 3개의 그룹으로 나뉘는 화이트 품종과 몇 가지 레드 품종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라틴어 무스쿰(muscum), 즉 사향(사향노루 수컷의 사향낭에서 얻어지는 흑갈색 가루)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품종에서 나오는 특징적인 아로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중에 가장 많이 알려져 디저트 와인의 대명사처럼 인식된, 모스카토 다스티를 만드는 포도는 그중 모스카토 비앙코라는 품종이다. 모스카토 집단 내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정 넓게 분포하고 있다. 서 아시아에서 시칠리아 남부인 노토(Noto) 지역에 전래되었다.     


그런데 벤리에는 이것과는 다른 모스카토 품종으로 만들어진다.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아프리카 북쪽 이슬람 지역에서부터 시칠리아 남쪽 판텔레리아 섬으로부터 전해진 모스카토 알레산드리아(Moscato Alexandria)라는 품종이다. 시칠리아에서는 지비보(Zibibbo)라고 부른다. 알사스나 독일, 마케도니아, 헝가리로 전해져 많은 스위트 와인의 모체가 된 품종이다. 벤리에는 라벨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판탈레리아 섬의 지비보로 만들어진 와인이다. 판텔레리아는 지중해 시칠리아 해협에 위치한 섬으로 지중해의 검은 진주로 불리는 곳이다. 튀니지 해안에서 동쪽으로 60km, 시칠리아에서 남서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다.     


지비보는 ‘dry grape’, 또는 ‘마른’이라는 뜻의 북아프리카어 ‘Zibibb’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랍인들이 매우 좋아했던 포도여서 그들이 정복하는 땅마다 가져가 재배하여 신선한 상태 또는 건포도로 만들어 소비했다.     


지비보 100%로 만든 벤리에는 우아한 황금색을 띠며. 살구, 대추야자, 말린 무화과 등의 매력적인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잘 구운 호박고구마의 맛을 느낄 수도 있다. 달콤하면서도 모스카토 다스티와는 다른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케이크나 단단하고 스파이시한 치즈 등과도 매우 잘 어울리는 와인이다. 그래서 많은 수상경력뿐만 아니라, 이태리 전 지역을 통틀어 많은 와인 메이커들조차 이 와인의 애호가일 정도로 ‘이태리 최고의 스위트 와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런 농축된 달콤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늦게 수확하여 포도가지에 포도가 달린 채 건조하거나 수확한 포도를 그늘에서 3-4개월 건조해 당분과 향미를 농축시키는 과정인 아파시멘토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포도로 만든 와인을 베네토 지방에서는 레초토(Recioto), 다른 지방에서는 파시토(Passito)라고 한다. 라벨에 적힌 ‘Passito di Pantelleria’는 판텔레리아에서 만든 파시토라는 정보를 담고 있다.


벤리에는 아라비아어로 바람의 아들(Son of the Wind)라는 뜻을 담고 있다. 끊임없이 포도송이 사이로 불어대는 지중해의 바람이 이 와인이 담고 있는 풍부한 향을 건네준다는 생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라벨 작업을 한 작가 스테파노 비탈레(Stefano Vitale)는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포도재배의 숭고한 노력을 그림으로 담았다고 한다.       


돈나푸가타(Donnafugata)는 국내에서 마케팅을 동반한 이야기로 더 유명한 와이너리다. 부르봉 왕국 페르디난도 4세의 아내이자 마리 앙투와네트의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 이야기가 그것이다. 돈나푸가타 와이너리 지역인 '콘테사 안텔리나(Contessa Entellina)로 피신,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라벨 그림과 더불어 돈나푸가타를 대중적으로 각인시켜주었다. 그래서 대부분 돈나푸가타를 와이너리 이름으로만 기억하기도 하지만, 돈나푸가타는 라구사도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영화 <레오파드>에서 가리발디의 등장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 시칠리아의 왕자 돈 파브리치가 가족들을 이끌고 주도州都 팔레르모를 떠나 도착하는 곳이 남동쪽 끝 부근에 있는 왕자의 영지 돈나푸가타이다.      


돈나푸가타는 서부 시실리의 심장부에 자리한 260 헥타르 정도의 콘테싸 엔텔리나의 포도원을 관리하고 있다. 1989년에는 판텔레리아섬의 2개의 DOC 와인인 모스카토(Moscato)와 파씨토 디 판텔레리아(Passito di Pantelleria)를 개발, 새롭게 소개한다는 명확한 전략적 목표를 갖고 이 섬에 진출했다.        



영화 <대부>에서 마이클 꼴리오네는 시칠리아 처녀 아폴로니아와 약혼식을 올리던 곳에서 쓸쓸한 오후에 생을 마감한다. 시칠리아는 그렇게 척박한 땅의 뜨거움과 쓸쓸한 풍광의 달콤함이 함께 어울리는 곳이다. 어디 시칠리아만 그러할까. 세상 모든 곳 모든 인간의 삶이 그럴 것이다.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마지막 빛의 향연 때문이기도, 기나긴 노동이 쌓아 올린 삶의 순간을 드디어 멈추는 시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수분을 최대한 줄이며 당분을 극대화한 후에야 최고의 디저트 와인이 만들어지듯, 수고한 자여 오늘은 그저 쓴 맛이 녹아있는 달콤함 속으로 잠시 빠져보자.        

  

#와인 #디저트와인 #그림일기 #대부 #시칠리아 #모스카토 #지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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