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는여자 Jun 19. 2021

나를 쳐다보지 말고 얘기를 하라고 부탁했다

아파서 미안해.

좋았던 날들과

힘들었던 날들과

그저 그랬던 날들

나를 만들었던 많은 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어떤 날들은 보드라운 땅에 닿아 뿌리를 내려 추억을 피웠고,

어떤 날들은 흙과, 나뭇잎 또는 쓰레기에 덮여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순간이 되었다.


거친 파도가 지나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한 바다가 되었지만 늘 그렇듯 의미 중독자인 나는 나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되돌려보며 의미 찾기를 지속했다. 남편과의 이혼위기와 아빠를 잃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는 큰 일이니 당연히 사건 전, 후 무언가 다른 점이 있어야만 했다. 남편과는 더 잘 지내게 되어 이전보다 더욱 화목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던지 그런 드라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루에 2리터가 넘는 맥주를 매일같이 마셨고, 나는 그가 어느 날 당뇨합병증으로 쓰러져 몸이 불편해지거나, 시력을 잃는 것 이 가장 두렵다. 나는 예전처럼 그가 '꼴 보기 싫다'라고 중얼거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빠를 묻고 온 그곳에 자주 찾아가며 살아 계셨을 때 불효를 반성하고 남아있는 엄마에게 더 좋은 딸이 되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혼 위기에 시작된 내 일이 아주 잘되는 등의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 

누워서 아빠 생각을 하며 눈물 흘리는 날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엄마가 미워졌고, 오기로 전화를 하지 않는 날이 이전보다 많다. 


육체는 정신을 반영한다고 했나. 건강과 체력을 자랑하던 온몸이 고장 나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걸을 수도 없을 만큼 허리가 아팠고, 어깨가 조금씩 아프더니 팔이 올라가질 않았고, 피부발진으로 온 얼굴과 팔다리가 간지럽고 각질이 일어나 긁을 때마다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계절의 여왕 제주의 5월은 아름답고 화려했고, 나는 온종일 집에 앉아 몇 번이고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하루를 보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기를 쓰고 밖으로 나가 오늘을 즐겼던 나는 먹는 것도, 보는 것도, 읽는 것도, (이 세 가지는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인데) 어떤 짓도 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들은 늘 에너지가 넘친다. 매일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고, 매일 정리와 미니멀 라이프와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동을 하고, 그 누구보다 똑똑하게 아이들을 교육시킨다. 틈틈이 돈도 벌고, 주말엔 남편과 아이들과 손잡고 나가 캠핑을 즐기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살기 위해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밤에 나가 걷는 것뿐이다. 머리 위에 떠있는 한낮의 해를 피할 수 있는 그늘 한 점 없는 낮시간은 내가 외출을 가장 꺼리는 시간이다. 걷지라도 않으면 어두움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물통 하나를 챙겨, 무거운 다리를 움직인다. 

식구들에게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분간 나를 쳐다보지 말고 얘기해줘"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 대화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엄마!'하면서 나를 쳐다봤고,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밤이 되어 아이 옆에 가만히 누워 달빛이 어스름이 비치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는 일이 내게 가장 평안한 순간이다. '엄마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눈물이 글썽한 나를 본 아이가 '괜찮아 엄마 얼굴은 곧 돌아올 거야. 허리도 벌써 다 나았잖아'라고 위로를 해준다. 

"미안해"

각질이 떨어진 피부로 눈물이 흐르자 따가웠다. 울면 안 돼


작가의 이전글 측은함과 미움은 같이 앉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