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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여자 Sep 08. 2021

우리가 매우 꺼리는 이야기

어쩌다 대화가 그때 이야기기 근처에 가기만 해도 서로 화들짝 놀랐다.

"가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온 그가 얘기했다. 

이맘때의 가을을 알리는 바람은 한겨울에 영하의 기온보다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전날까지 뜨거운 태양볕에 바다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오늘 긴팔을 입게 되는 변화는 40년 넘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몸도 그렇다.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나며, 피부는 건조해진다. 


그와 언제 이혼을 얘기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면대면, 때론 따뜻하게 손을 잡기도 하고, 어깨동무

를 하기도 하며 두 계절을 보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작년 이맘때 우리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쩌다가 대화가 그때 이야기기 근처에 가기만 해도 서로 화들짝 놀라 화두를 바꾸기 바빴다.

그는 어떤 마음일까 생각이 들거나, 지독한 악감정이 올라올 때면 '미안해서 말을 못 한 걸 꺼야', 또는 '

옛날 일 들추어내서 뭐해' 하며 서둘러 그때 그 감정에 흙을 덮었다. 이렇게 대충 덮어두는 것이 좋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은 알지만 서로의 감정을 발간 속살로 드러내 놓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해결

방법을 우리 둘은 잘 몰랐다. 괜한 얘기를 꺼내 나도 모르게 진심이 나와 큰소리를 내며 끝장을 내게 

될까 무서웠다.


그사이 그는 오랜 직장에서 퇴사를 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에 만족하지 

못해 육지행을 결정했다. 퇴사와 새로운 일의 시기가 맞지 않아 아이들의 방학과 함께 그도 긴 여름방

학을 함께 보냈다. 늦잠을 자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거실 한편에 빈둥대며 쉬다가, 저녁이 되면 

늘 그랬듯 맥주를 마시고, 가족 중에 가장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예전 일을 완전히 잊었을 때 나는 한없이 친절한 아내였고, 식사 준비에도 충실했다.

예전 일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면 나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눈을 흘기고, 구시렁 대며 한없이 차가워져

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여 몇 시간 만날 때는 흙을 덮어둔 채 하루를 잘 지날 수 있었지만

하루 종일 함께 있을 때는 순탄하지 않았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급의 한 달은 가슴 졸리는 일이다. 모아둔 돈이 아니라 대출받은 돈을 

쓰는 기분은 더욱 그렇다. 장을 볼 때도 덜어내는 일이 많았고, 외식의 횟수도 현저히 줄어든다. 

기약도 없을 것 같은 그의 방학은 바로 어제 그가 짐을 싸며 끝날 기미가 보였다. 이렇게 노는 것이 불

안 하다던 그는 마음먹고 적극적으로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어딘가에 전화를 했고, 바로 그다음 날 

떠날 배를 예약했다. 

서류상으로 가장 가깝고, 마음으로 가장 먼 지금 우리

한참 못 볼 아이가 등교를 하는데 그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다. 일어나라고 말을 하자 겨우겨우 일어

나 "갔다 와. 아빠도 갔다 올게"라고 말하고 침대로 다시 가서 누웠다. 이제 오랫동안 못 보니까 안 하던 

등교 드롭을 해준다던가 하는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못 볼 그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LA갈비를 구웠고, 마지막 게장도 아낌없이 차려냈다. 

아침을 먹 고고 짐을 싸러 오르락내리락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슬리퍼와 세면도구를 백팩에 챙겨 넣고 

현관에 서서 45도각도로 나를 쳐다보며 "갔다 올게"라고 말했다.

나는 굳이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고,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떠나는 그를 지켜봤다. 

내가 싫어하는 바이크의 큰 굉음소리에 엄청나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가슴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이 슬픔이 외로움인지, 미안함인지, 안도감인지, 기쁨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도 한참을 눈물이 났다


그는 점점 멀어지는 배에서 제주도를 쳐다보며 "가족들을 두고 떠나는 마음이 슬프다" 피드를 올렸다. 그의 마음을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우리가 서로 엉덩이를 빼고 멀찍이 서서 두 손을 맞잡고 울타리를 만드는 가정은 긴 이별에 안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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