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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카 Sep 12. 2018

<치킨 런>, 강제수용소와 페미니즘 공산주의(1)

B급문화 전성기-6



공장식 축산을 피해 농장을 탈출한 닭들의 이야기, <치킨 런>은 재밌게도 ‘동물권’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동물권’을 영화 주제로 내세웠다고 했을 때, 영화 내용 면면은 안이하게 느껴질 것이다. 대표적으로, 농장의 밀수꾼 쥐 닉과 패쳐가 달걀을 약탈해가는 모습이 그저 하나의 말썽으로 포장되는 장면은 어쩐지 끔찍하다. 물론 영화상의 허구적 문법에서 이는 충분히 개연성 있게 비춰진다. 심지어 닭들은 자발적으로 달걀을 거래해 닉과 패쳐에게서 밀수품을 구한다. <치킨 런>만의 허구세계 속에서 ‘달걀’은 그저 하나의 유용한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동물의 신체가 강제적으로 자원화 되는 민감한 현실을 인식했다면, 이 문제를 장난스럽게 다루진 않았을 것이다.     

파렴치한 밀수꾼들(...)

무엇보다 정말 동물권을 옹호하고 싶다면 애초에 닭을 ‘인격적 지성을 가진 개체’로 표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물권 옹호자는 동물이 인간과 같은 ‘지성’을 갖췄기에 그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관점은 인간중심적인 인식에 가깝다. 이성만능적 관점의 협소한 인식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동물권 옹호의 첫 출발점이다. 이런 면에서, 오히려 <치킨 런>은 ‘닭’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단, 하나의 커다란 ‘알레고리’ 영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치킨 런>은 강제수용소와, 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공산주의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제수용소와 홀로코스트     



그래도 <치킨 런>에서 예리하게 포착한 ‘현실’ 있다면, ‘암탉’이라는 여성-동물의 신체가 단지 ‘달걀을 생산하는 기계’로 자원화 되는 지점이다. 현실에서 암탉은 비좁은 양계장 속에 갇혀 끊임없이 달걀을 낳기만 한다. <치킨 런> 속 수많은 닭은 매일 달걀을 생산하도록 강제된다. ‘달걀’을 생산하지 못하는 닭은 ‘식거리’가 되어 사형에 처한다. 어찌 보면 소설 『시녀 이야기』의 동물우화버전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시녀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 ‘가임 여성’은 ‘주인’의 아이를 무조건 생산해야 하는 ‘시녀’ 신분으로 살아간다(얼마 전 행정자치부에서 발표한 ‘가임기 여성지도’가 여성을 노동인구 생산을 위한 자원으로 도구화한 현실비추어, 이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치킨 런> 속 닭들은 ‘달걀을 생산하는 자궁’으로 취급당한다.      


드라마로도 나온『시녀 이야기』


<치킨 런>은 『시녀 이야기』와 같은 ‘여성-디스토피아’ 장르를 선구하는 영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등장인물의 여성-신체에 초점을 맞추진 않는다. 여성-동물의 신체가 착취당하는 실질적 과정은 삭제되다. 오히려 닭들은 여성-동물로서 신체가 착취당한다기보다는, 그저 강제적인 노동이 부과되었다는 식으로 토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신체는 특정한 자원으로 대상화되어 착취당하고 있으나, 여성-동물로서의 특수한 고통은 형상화되지 않는다. ‘달걀’을 마치 건장한 신체만 가진다면 혼자서도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해, 일종의 외부 재화생산에 동원된 죄수처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달걀은 여기서 ‘미래의 노동인구’가 아닌, 교환 가능한 ‘화폐’와 동일시된다. 때문에 <치킨 런>의 닭들은 억압받는 여성보다는 교환 가능한 재화를 강제로 생산하는 죄수에 가깝다.     


영화 주인공 ‘진저’가 철조망 아래를 통과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진저는 곧 양계장 주인에게 잡혀 쓰레기통에 갇힌다. 쓰레기통은 ‘독방’이며, 양계장은 전쟁포로들을 가둬놓는 ‘수용소’와 같다. 닭들은 막사처럼 생긴 양계장에서 생활하며, 일정한 시간에 점호를 받는다. 심지어 양계장 주인은 수용소 감독관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주인공 진저기러기를 보며 ‘하늘로 탈출’하겠다고 상상하는 장면은, 어쩐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이 ‘수용소의 유일한 탈출구는 굴뚝’이라고 말했던 것만큼 비현실적이다. ‘노동(달걀 생산)’의 유용성에 포섭되지 않는 닭은 살해되고, 나머지 닭은 똑같은 일과 속에서 노예처럼 살아간다.      


<치킨 런>의 점호 장면. 양계장은 마치 수용소의 막사와 같고, 주인들은 감독관처럼 보인다.

이쯤이면 강제노동수용소의 반영이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치킨 런>은 ‘닭’의 형태로 강제노동수용소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는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만 존재한다(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제수용소가 전체주의 체제를 완성한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중대한 위치를 점했던 강제수용소가, 인간을 마치 양계장 속 닭처럼 취급했음이 폭로된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문구 아래서 자원생산의 도구가 된 유대인들과, 달걀을 낳도록 강제되는 닭의 신세는 얼마나 다를까? 이처럼 <치킨 런>은 양계장이라는 알레고리로 전체주의 사회의 공포를 역설한다.     


물론 실체화된 강제수용소는 <치킨 런>의 양계장보다 처참했다. <치킨 런>은 어디까지나 ‘알레고리’로 표현할 뿐이다. 종국에 <치킨 런>은 홀로코스트를 그려내는데, 무시무시한 공장식 축기구 '치킨파이 기계'가 바로 그것이다. 대량의 닭을 일순간 ‘치킨파이’로 가공해내는 이 거대한 기구는, 수많은 인간을 학살할 수 있는 무기 혹은 가스실을 연상시킨다. 나치가 패망 직전 유대인을 아우슈비츠에서 학하고 떠나려 했던 것처럼, 양계장 주인들은 농장을 치워버리고 대량의 닭을 학살하는 치킨파이 공장을 세우려 한다. 인격화된 닭들에게 ‘치킨파이 공장’은 홀로코스트의 상징이다.

홀로코스트를 상징하는 '치킨파이 기계'


아렌트는 나치 수용소에서의 생존을 '예수의 부활'에 견주었다. 수용소는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하며, 수용소에 끌려간 존재는 세계에서 상실된다. 외부인들은 수용소로 끌려간 죄수를 더 이상 살아있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수용소 내부에서 이들의 인격은 말살된다. 그러므로 수용소에서 귀환한 생존자들은 '부활'한 것과 같다. <치킨 런>닭들 그저 '노동'을 위한 대상으로 사물화되며, 존재 근거가 '량'으로 위치는 지까지 이른다. 그러나 닭들은 손쉽게 주인이 자신을 '말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신체가 자원화되는데 저항하고, 새로운 세계로 탈출하려 한다. 그렇게 자신들이 '생동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페미니즘 공산주의'를 지향하며 죽음 속에서 깨어난다.



*2편, '죄수들의 봉기, 그리고 페미니즘 공산주의'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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