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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이재 Oct 29. 2022

육아전선, 권태기가 찾아왔다.

[강점멘토레오의 실존육아] 치열한 삶 속에서 만난 육아 권태기

"아빠 요즘은 왜 유튜브 안 하는데? “

첫째가 나에게 따지며 물었다. 한 때 운영했던 유튜브 채널의 육아 영상을 보면서 던진 질문이다. 촬영한 영상이 제법 많다. 오랜만에 보니 재미있다. 서로 키득 거리며 시청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보는 내내 여러 생각이 다녀갔다. 나도 참 유난을 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딜 나갈 때면 카메라와 삼각대, 드론까지 동원했으니 말이다.

“왜 요즘은 유튜브 안 하냐고?”

첫째가 다시 물었다.

"응. 요즘 너무 귀찮아."

이실직고했다. 요즘 들어 어딜 놀러 가는 것도 귀찮고, 밥 차려주는 것도 귀찮았다. 예전 같지 않은 내 모습이 낯설었다. 부부 사이에도 찾아오지 않은 권태기가 육아 전선에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권태(倦怠)란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말한다. 

    

대립하는 두 개의  마음

꽃을 딴다고 한 없이 여유를 부리는 둘째의 등원 길에서 ‘빨리 와!’라고 짜증을 부렸다. ⓒ문선종

곧 있으면 마흔이다. 잡스러운 걱정들이 느닷없이 밀려든다. 늘 밤잠을 설치며 앞으로 뭘 해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아빠로서 잘할 수 있을까? IMF 때 실직했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권태도 혼돈일 것이다. 그 속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좋은 부모인가? 나는 나쁜 부모인가? 이 두 마음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해댄다. 역시나 그 두 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약한 줄 위에는 설 수 없다. 두 마음의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팽팽해질 때 외줄타기를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립하는 마음은 필연적이다. 그 속에서 권태로움은 다음 단계를 내딛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일 뉴스에서는 금리인상을 보도하며 영끌족의 비명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내가 바로 그 영끌족이다. 비명횡사를 하느냐 끝까지 살아 버티느냐의 대립하는 두 개의 마음은 팽팽하다. 여러 사안에 있어서 각을 세우는 극단의 두 마음은 마치 정치판의 진보와 보수의 전면전 같다. 결국 힘겨루기에서 이기는 쪽이 곧 우리의 삶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했다. ‘춤추는 별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무기력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권태의 신이 강림한 것이다. 어떤 의지에 힘을 실을 것인가? 나는 좋은 부모이자 부자아빠이자 영끌에서 살아남은 자가 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의지이다. 어느새 내 손에는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책이 들려있다.  

  

치열함 속의 권태

점점 늦어지고 있는 기상시간. 육아에 나태해지고 있다. ⓒ문선종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의지에 힘을 실으며 삶을 지탱하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쁜 아빠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가난한 아빠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진을 넘어 탈진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시종일관 불철주야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치열하게 살며 탈진을 경험한 나머지 어느덧 삶의 의미를 잃고, 목적을 상실했다. 그때 권태가 찾아오는 것이다. 결국 권태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야 한다. 이로서 우리의 의지는 상승하는 것이며 성장한다.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까지인가?   

  

철학자 칸트는 죽기 전 와인 한 잔을 청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좋았다(Es ist gut)"라고 속삭이고 영면했다. 병약한 그가 규칙적인 삶으로 80세까지 살아가며 남긴 업적을 봤을 때 그의 삶은 치열했을 것이다. 와인의 맛만큼 자신의 삶이 ‘좋았다’고 갈무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죽을 때 끊었던 담배 한 대를 피우며 “그래도 좋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권태새로운 동력을 얻을 전환기

육아에서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지난 육아를 돌아보면서 가장 놀라운 순간을 공유해본다. 아기들은 언어를 모른다. 세상과 소통할 때 유일한 것이 호소하는 것이다. 양육자에게 울음으로 호소한다. 울음소리가 처음에는 단조롭지만 점점 감각이 분화되면서 미묘하게 달라진다. 수많은 시행착오로 나는 아기의 호소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단박에 알아채기 시작했다. 모성적 돌봄을 남자인 나도 해냈다는 성취감에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정신의학자들은 여기서 아이의 마음 구조가 생겨난다고 했다. 아기의 호소에 응답하고 책임을 다하며 마음이라는 내면세계의 공간을 아기와 함께 창조해낸 것이다.      


이 외에도 드라마틱한 경험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요즘은 ‘다 키웠지 뭐’라는 생각에 목적이 사라졌다. ‘그냥 알아서 커라’는 마음도 있다. 그런데 요즘 첫째가 성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 그렇다. 다시 책을 펼치고 공부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푹신한 소파의 아늑함과 결별하고 마음을 다잡아 딱딱한 의자에 앉아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다시금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켜봐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육아에 골든타임은 없다. 육아의 완벽한 시제는 현재이다. 지금이 중요하다. 내 아이만의 시계에 맞춰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 삶을 살아가는 힘, 강점으로 실존성을 회복하며 육아하는 것이 실존 육아의 중요한 부분이다. 권태가 찾아와도 긍정성의 힘을 가진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회기의 끝없는 육아

실존육아에서는 실존주의철학을 자주 빌려온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빌려 질문해본다. 아니다. 당신은 이미 이와 비슷한 질문을 수차례 받았을 것이다. 


“여보, 당신은 다음 생에 나랑 또 결혼할 거야?” 아! 이 얼마나 아찔한 질문인가? 당신은 무엇이라 답했는가? 니체의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해서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영원회기의 핵심은 이번 인생을 포기한 사람은 다음 삶도 똑같다는 것이다. ‘이생망’이 유행처럼 번진 시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포기했는가? 다른 한편에는 지금의 삶을 긍정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여보, 나는 백번 고쳐 죽어도 당신과 결혼할 거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답인가! 결혼을 육아와 바꿔도 손색이 없다. 자문자답해보자. ‘나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가?’ 이 질문에는 당신은 얼마나 자신의 삶과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부모로서의 막중한 책임감, 권태감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대지위의 순간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위 칼럼은 베이비뉴스에 연재된 글입니다.


*강점멘토 레오(본명 문선종)은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시절 비영리민간단체(NPO)를 시작으로 사회복지법인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이르기까지 아동상담 및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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