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계를 읽는 첫 번째 문해력 — 술래로 살아가야 할 때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세계를 읽는 첫 번째 문해력 — 술래로 살아가야 할 때

세계를 읽는 첫 번째 능력 — 감각적 문해력의 회복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술래가 사라진 시대, 당신의 아이는 오늘 무엇을 '발견'했나요?

아침에 창밖을 내다보며 구름의 모양을 관찰했나요? 학교 가는 길에 개나리 향기를 맡았나요? 친구의 표정에서 어제와 다른 무언가를 알아챘나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는 아침부터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등굣길에는 이어폰을 끼고,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숏폼 영상을 돌려봤을 것입니다.

우리는 '문해력'이라고 하면 당연히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떠올립니다. 아이가 책을 술술 읽고, 독후감을 잘 쓰면 문해력이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측정 불가능한 문해력, 눈에 보이지 않는 문해력,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결정짓는 진짜 문해력에 관한 것입니다.


김춘수의 시 「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봅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 그것은 단순히 명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아직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 언어로 불러내는 행위입니다. 저는 이것을 '술래 되기'라고 부릅니다.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숨은 아이를 찾아내듯, 우리는 세상 속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찾아내는 술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아니 우리 스스로도 언제부턴가 술래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사유의 전개: 문해력의 진짜 시작 — 이름 붙이기의 역사

문해력은 문자를 읽는 능력이 아닙니다. 문해력의 진짜 시작은 세계를 관찰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능력입니다.


양자역학의 이중슬릿 실험을 떠올려보겠습니다. 전자를 이중 슬릿에 통과시킬 때, 관찰자가 없으면 전자는 파동처럼 행동하며 간섭무늬를 만듭니다. 그런데 누군가 관찰하는 순간, 전자는 입자처럼 행동하며 특정 위치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관찰자 효과'입니다.


관찰한다는 것, 즉 술래가 된다는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세계는 여러 가능성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발견하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됩니다.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과거 외부 문명과 단절되었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라는 개념과 언어가 없었기에, 처음 수평선에 나타난 거대한 배를 인식하지 못하고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배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배를 가리키는 언어가 없었기에, 그들의 뇌는 그것을 '무엇'으로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혹시 영화 아포칼립토의 마지막 장면 기억하시나요?


주인공 '표범 발'이 마야 문명의 추격자들을 피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해안가에 도착한 그는 문득 수평선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거대한 범선들이 떠 있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배였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저 배가 가져올 미래를, 자신들의 세계가 끝나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상징합니다. 모든 문명이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들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특이점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채,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 우리도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배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AI라는 이름의 범선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배를 볼 수 있을까요?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 배가 가져올 미래를 읽어낼 언어를 가지고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읽지 못한다면, 결과는 자명합니다. 마야 문명처럼, 우리는 여전히 눈앞의 추격전에만 몰두한 채 정작 중요한 변화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언어가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 철학의 거장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다."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범위는 우리가 가진 언어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지금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을까요? '좋아요', '대박', '별로', '레전드'. 이 몇 개의 단어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 합니다. 복잡한 감정의 결, 미묘한 관계의 변화, 세밀한 자연의 움직임을 표현할 언어가 없습니다. 언어가 없으니, 그들은 그것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인류 최초의 문해력 — 감각으로 세계를 읽다

인류는 언제부터 세계를 '읽기' 시작했을까요? 문자가 발명되기 훨씬 전, 인간은 이미 세계를 읽고 있었습니다. 고대 인류에게 문해력이란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아침에 부는 바람의 방향을 읽으면 오늘 사냥감이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있었습니다. 구름의 모양을 읽으면 비가 올지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읽으면 배가 고픈지, 아픈지, 무서운지 알 수 있었습니다. 족장의 표정을 읽으면 부족의 다음 행보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적 문해력입니다. 글자가 없어도, 책이 없어도, 인간은 세계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세계와 교감했고, 그 경험을 언어로 만들어냈습니다. "저 구름은 비구름이다", "이 풀은 독이 있다", "저 사람은 화가 났다". 이 언어들은 모두 세심한 관찰과 반복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맡고, 혀로 맛보는 모든 감각이 우리의 사유를 구성합니다. 고대인들은 이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읽었고, 그것을 언어로 썼습니다. 그들의 신화, 전설, 노래가 바로 그 기록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떤 감각으로 세계를 읽고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계층에 따라 극명하게 갈립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IT 거물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디지털 기기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 그들의 아이들은 나무로 만든 교구로 놀고, 칠판과 분필로 글씨를 쓰며,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다닙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녀들의 아이패드 사용 시간을 엄격히 제한했고, 빌 게이츠는 14세가 되기 전까지 자녀에게 스마트폰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진짜 창의성과 사유는 손끝의 감각에서, 몸의 움직임에서, 자연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디지털 기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그것으로부터 보호하려 한다는 사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반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아이들은 점점 더 디지털 세계에 갇히고 있습니다. 공교육 현장에서는 태블릿이 보급되고, 디지털 교과서가 확대되며, 모든 학습이 화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가 일하러 나간 집에서 아이들은 홀로 스마트폰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습니다. '디지털 격차'라는 말이 과거에는 기술 접근성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역설적으로 '감각으로부터의 격차'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교육부의 전면적 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반대합니다. 물론 디지털 기술은 훌륭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감각적 경험을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뇌가 발달하는 시기의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터넷을 통한 '초연결(Hyper-connectivity)'이 아니라, 아이들 개개인이 자신의 오감으로 타인과 자연과 세계와 만나는 '초감각(Hyper-sensibility)'입니다. 손으로 흙을 만지며 식물을 키우는 경험, 친구의 표정을 직접 보며 감정을 읽어내는 훈련, 종이에 연필로 글씨를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이 모든 감각적 문해력이야말로 AI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입니다. 감각이 살아있어야 관찰할 수 있고, 관찰할 수 있어야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사유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은 이 과정의 마지막에 도구로 활용되어야지, 출발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각을 잃어버린 아이들

수업 시간에 저는 아이들에게 창밖을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저 나무를 보고 느낀 걸 말해볼래?"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초록색이요."


초록색. 그게 전부였습니다. 나무의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가지마다 다른 그림자의 농도, 새가 앉았다 날아가는 순간, 이 모든 풍경이 그 아이에게는 그저 '초록색'으로만 읽혔습니다. 그 아이는 나무를 '본' 것이 아닙니다. 그저 화면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로 인식했을 뿐입니다.


다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친구 얼굴을 봤을 때 뭔가 달라 보이지 않았어?"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아니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날 그 친구는 머리를 자르고 왔었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지냈지만, 아이는 친구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관찰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이것은 세계에 대한 관심의 문제입니다. 세계를 술래처럼 탐색하려는 본능이 사라진 것입니다.


한 어머니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감정 표현을 못해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고만 해요.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면 '모르겠어요'라고 해요. 제가 더 물어보면 짜증을 내더라고요." 이 아이는 정말로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이는 분명 무언가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일 언어가 없었습니다. '슬프다'와 '외롭다'와 '허전하다'의 차이를 구별할 감각이 무뎌진 것입니다. 감각이 무뎌지니 관찰할 수 없고, 관찰하지 못하니 언어가 생기지 않으며, 언어가 없으니 사유할 수 없습니다.


DNA에는 부호화된 정보가 20%, 비부호화된 정보가 80%라고 합니다. 우리가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문해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기 속도, 어휘량, 독해 점수로 측정되는 것은 20%에 불과합니다. 진짜 문해력의 80%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세계를 감각하고,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언어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다시, 술래로 살아가기

구약성서 에스겔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부모가 신 포도를 먹으니 자식의 이가 시리더라." 부모 세대의 감정, 트라우마, 내적 상처가 자녀에게 유전된다는 뜻입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세대를 넘어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있을까요? 혹시 우리도 술래 되기를 포기한 채, 네모난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나요? 퇴근 후 피곤하다는 이유로 유튜브만 보고, 아이에게는 "책 읽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나요?

작금의 시대를 '디지털 봉건주의'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테크노 퓨달리즘이라는 개념은 놀랍지도 않은 표현입니다. 중세 봉건제에서 농노들은 영주의 땅에서 평생을 일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누군가 만든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소비하고,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정보만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합니다.


저의 북클럽에 등록한 한 아이의 사례가 이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어머니는 초조한 표정으로 상담실 문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스마트폰 중독인 것 같아요. 책이라도 읽혔으면 해서 찾아왔어요."


저는 우선 정확한 현황 파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얼마나 콘텐츠를 소비하는지 척도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유튜브 앱 사용 시간만 일주일에 32시간. 하루 평균 4시간 이상이었습니다.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부모님께 설명했습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아이가 하루 8시간씩 잔다고 가정하면 깨어있는 시간은 112시간입니다. 이 중 32시간, 거의 3일을 유튜브를 위해 쓴 셈입니다." 부모님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은근슬쩍 자신의 시간을 플랫폼을 위해 바치고 있습니다. 시청 시간은 영상 제작자와 플랫폼에게는 돈이 됩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무엇이 남나요? 지금 이 삶의 패턴은,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거의 노예 수준입니다."


강한 표현이었지만,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농노들은 영주의 땅에서 일주일 중 사흘을 무상으로 일했습니다. 이 아이도 일주일 중 사흘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플랫폼에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중세 농노는 자신이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아이는 '놀고 있다'라고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32시간 동안 아이는 단 한 번도 술래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을 수동적으로 소비했을 뿐,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질문하거나,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0.5초마다 화면이 바뀌는 숏폼 영상 속에서, 아이의 감각은 점점 무뎌졌고, 관찰하는 능력은 퇴화했으며, 사유하는 습관은 사라졌습니다.


32시간. 만약 그 시간에 아이가 밖에 나가 나무를 관찰하고, 친구와 대화하고,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아이의 언어는, 감각은, 세계를 읽는 능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술래가 되지 않는 인간은 누군가의 세계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세상의 사람과 사물을 발견하지 않으면, 누군가 정해준 의미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문해력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아니,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책을 직접 추천하지 않습니다. "이 책 읽어봐"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숙제가 되어버립니다. 대신 저는 책 속 주인공의 대사 한 줄, 상황 묘사 한 문장을 필사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이런 문장을 건넵니다.


"전에는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면도를 해주는 게 즐거웠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야. 그런데 이상한 건, 시간을 절약하면 할수록 시간이 더 없어진다는 거야."

- 미하엘 엔데의 『모모』 시간을 잃어버린 이발사 푸지의 대사 중에서


아이들은 이 문장을 천천히 옮겨 씁니다. 손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따라 쓰는 동안, 이발사 푸지의 당혹감이 아이의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지? 왜 시간을 절약하는데 시간이 없어진다는 거지?"


혹은 이런 문장을 건넵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더 바쁘게 살았지만, 정작 절약한 시간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32시간 동안 유튜브를 본 그 아이도 이 문장을 필사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쓰더니, 고개를 들고 저를 바라봤습니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선생님, 이거... 나 같은데요?" 그런 자작의 순간이 쌓이는 순간 서서히 아이는 술래가 되었습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시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 책에 답이 있나요? 시간을 지키는 방법이요?"


78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6개월간 이런 방식으로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96%의 아이들이 스스로 그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술래가 되어 도서관 서가 속에 꼭꼭 숨어 있던 『모모』를 찾아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아이들은 『모모』를 읽으며 '회색 신사들'이라는 시간도둑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 속의 시간도둑이 누구인지 스스로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 게임 속 보상 시스템, 끝없이 이어지는 숏폼 영상. 이것들이 바로 현대판 회색 신사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필사는 단순히 글씨를 옮겨 쓰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모모가 느낀 감각을, 이발사 푸지가 느낀 혼란을, 내 손끝으로 따라 쓰는 순간, 그들의 경험이 나의 경험이 됩니다. 그리고 문득, 책 속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적 문해력입니다. 손끝의 감각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읽어내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능력 말입니다.


오늘 저녁, 아이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세요. 그리고 물어보세요. "저 구름이 뭐처럼 보여?" 아이가 대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바라보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내일은 동네를 산책하며 물어보세요. "오늘 바람 냄새가 어제와 다른 것 같지 않아?" 아이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라도 괜찮습니다. 감각을 일깨우는 것, 그것이 문해력의 시작입니다. 세계를 관찰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유의 시작입니다. 아이가 다시 술래가 되도록, 우리 어른들이 먼저 술래가 되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언어를 확장하면 세계도 확장됩니다. 아이에게 열 개의 새로운 언어를 선물하면, 아이의 세계는 열 배로 넓어집니다. "쓸쓸하다", "애틋하다", "아련하다", "먹먹하다", "간절하다". 이 언어들을 알게 되는 순간,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타인의 표정에서도, 책 속 문장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문해력은 글자를 읽는 기술이 아닙니다. 세계를 읽고, 자신을 읽고, 타인을 읽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감각하기'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의 아이는 오늘 무엇을 발견했나요?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만약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일은 함께 발견하러 나가보세요. 손을 잡고, 천천히 걸으며, 세상을 다시 읽어보세요. 그것이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의 첫걸음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