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신화를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인간을 배우지 않는 것과 같다"
— 나카자와 신이치
여러분은 혹시 아이가 인형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저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아이가 곰 인형을 무릎에 앉히고 진지하게 말합니다. "곰돌아,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내가 이야기 들어줄게." 그런 모습을 보면 정말 정말 귀엽습니다. 한 번은 초등학교 5학년 어머님이 저에게 걱정하며 물어보셨습니다. "아이가 아직 인형을 갖고 노는데 괜찮을까요?" 대부분의 부모님이 하시는 걱정입니다. 나이에 비해 유치한 건 아닌지, 또래보다 발달이 늦은 건 아닌지 염려하시는 것이죠.
아동발달에서도 이런 현상을 '물활론(Animism)'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결코 발달이 늦거나 유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가 거쳐 가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중요한 인지 발달 단계입니다. 저명한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이 시기의 아이들이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보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사물(인형, 돌멩이 등)에도 자신과 똑같은 생명과 감정이 있다고 믿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아이의 눈에는 곰 인형이 정말로 살아 숨 쉬며 감정을 나누는 친구인 셈입니다. 아이는 인형과의 대화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고, 공감하는 능력을 기르는 최초의 연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사유가 중요할까요? 그 답은 인류 최고의 철학 속에 있습니다.
애니마, 살아 숨 쉬는 세계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의 어원을 아시나요? 바로 라틴어 'anima', 영혼이나 생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심리학 용어이자, 인류학의 핵심 개념인 애니미즘(Animism)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애니미즘은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세계관입니다. 돌멩이에도, 나무에도, 바람에도, 심지어 인형에도 영혼이 있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죠.
흥미롭게도, 우리 아이들이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물활론적 사고'는 인류가 태초에 세상을 이해하던 방식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를 '미신'이나 '원시적 믿음'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과 관계 맺는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방식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를 살아있는 파트너로 인식하는 지혜였던 것이죠.
지금도 우리는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기를 출산할 때는 삼신할머니에게 빕니다. 이것이 바로 태초부터 내려오는 인류 최고의 철학이자 최초의 문해력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유 말입니다.
유동적 사고의 탄생
상상해봅시다. 저기 들판에 인류의 조상들이 서 있습니다. 갑자기 '콰광!'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것도 마을을 지키던 오래된 나무에 말입니다. 잠시 후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불이 붙습니다. 부족들은 벌벌 떨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신이 노하셨다. 저 나무를 불태워 우리에게 경고하신 것이다."
곧이어 재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냅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이 광경은 '미개'하고 '비합리적'입니다. 벼락은 기상 현상일 뿐이고, 나무에 불이 붙은 것은 물리적 법칙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잠시 멈춰 생각해봅시다. 그들이 정말 무지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걸까요?
이 장면에는 '유동적 사고'가 담겨 있습니다. 유동적 사고란, 고정된 사고의 틀을 넘어서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서로 다른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읽어내며,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벼락이 쳤다는 사건과 나무에 불이 붙었다는 사건. 이 둘을 연결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유동적 사고입니다.
만약 이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두 사건은 각각 개별적으로만 존재할 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벼락은 벼락이고, 불은 불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조상들은 이 둘을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신의 뜻'이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놀라운 인지적 도약입니다.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패턴을 발견하며, 그것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일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날씨 예보에서 "오늘은 비가 올 예정이니 우산을 준비하세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산을 챙깁니다. 하지만 유동적 사고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비가 온다'는 정보와 '우산을 챙긴다'는 행동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두 개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유동적 사고가 없다면 우리는 인과관계, 상관관계, 상호작용, 비례, 비교, 위계 등 수많은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적응을 위한 행동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즉, 유동적 사고 자체가 문해력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인류의 자산입니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 신이치는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에서 신화가 단순한 이야기나 미신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철학적 도구라고 강조합니다. 신화는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그 안에는 인류가 축적해온 정신적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원시인'이라고 하면 미개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볼까요? 왜 우리는 아직도 고대인들의 지혜를 인용할까요? 왜 구전으로 내려온 신화를 공부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미개'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로부터 무언가 중요한 것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약 1만 년 전, 농업을 시작했던 신석기 혁명 시기, 인류는 사고방식의 큰 전환을 겪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시대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이미 현대인과 동등한 인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뇌의 용량이나 사고 능력에서 결코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교육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상당 부분은 최근 수백 년 사이에 발전한 것들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지혜도 포함되어 있지만, 인류 전체 역사를 놓고 보면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반면 신화는 수만 년에 걸쳐 형성된 인류의 집단 지성이 담긴 결정체입니다. 신화 속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같은 근본적 질문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신화와 고전, 철학을 읽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고 더 깊이 있는 사유를 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지혜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이를 탐구하는 행위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교양이 아닐까요?
동화 속에 살아있는 신화적 사고
그림 형제의 민담집을 아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한 '창작 동화'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구전 민담입니다. 그 안에는 인류의 원형적 사유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랑이에게 쫓기던 오누이가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는 이야기. 어른들은 이것을 '옛날이야기'로 치부하지만, 아이들은 다릅니다.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묻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어떻게 말을 해요?" "하늘로 어떻게 올라가요?" 그런 질문 자체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은 논리적 인과관계를 따지는 분석적 사고보다는, 이미지와 상징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신화적 사고의 영역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정신 근원에는 신화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이해합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세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아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구체적 사고에서 추상적 사고로 발전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신화적 사고는 단순히 '미성숙한 단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상징을 통해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인지적 도구입니다.
신화와 민담은 선과 악, 두려움과 용기, 상실과 회복 같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상징적으로 담아냅니다.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겪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만들어갑니다.
제가 학령전기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다양한 동화책과 함께 잠에 들기 전에 그림 형제의 민담집을 권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의 창작 동화들도 좋지만,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구전되며 다듬어진 민담에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인류가 오랜 시간 공유해온 원형적 이미지와 상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빨간 망토, 마법의 콩나무, 유리구두 같은 상징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아이들의 무의식에 말을 거는 언어입니다.
일상 속의 신화적 사고
이러한 신화적 사고는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살아 숨 쉽니다. 아이들이 애착인형을 만들어 인형과 대화하며 그것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여기는 행동을 떠올려보세요. 어른의 눈에는 단순한 '놀이'로 보이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정신적 활동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이나 자연의 상징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과 상호작용한 것처럼, 아이들도 애착인형이라는 대상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의 내면을 탐색합니다. 아이들은 인형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인형을 통해 두려움을 표현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와 규칙을 만들어냅니다. 인형은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아이는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배웁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익히고, 복잡한 내면을 정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가 아닙니다. 아이가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는 근본적인 과정입니다. 신화적 사고는 이렇게 아이들의 일상 속에서, 그들의 성장과 함께 작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뇌 속에는 여전히 물활론적 사고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목격할 때마다 안도합니다. 아직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아이들은 인형에게 말을 걸고, 자동차에 이름을 붙이며, 해와 달을 친구처럼 여깁니다. "해님, 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순한 말버릇이 아닙니다. 그것은 3만 년 인류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세계와 대화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정작 어른들도 판타지 소설이나 문학, 영화를 좋아하면서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준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무슨 사람이 곰이랑 호랑이랑 대화를 하냐?"라며 동화책이 유치하다고 던지셨습니까? 그렇지 않죠?
아이는 매일 인류가 3만 년 동안 이어온 가장 근원적인 사고방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바로 유동적 사고, 신화적 사고입니다. 아이는 무생물인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자가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이 세계를 읽어온 방식입니다.
대칭성의 회복, 인류의 생존
일본의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를 '대칭성 인류학'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생명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던 시대. 모든 것이 '대칭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시대의 사고방식입니다. 물활론은 바로 이 대칭성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농경사회가 시작되고, 문자가 발명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이 물활론적 세계관을 잃어버렸습니다. 세계는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분석되고 측정되고 이용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자 인간에게 종속된 자원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런 사유를 회복하지 않으면 인류가 절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인류는 어떤 지점에서 야만적인 역사를 쓰면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들은 지금처럼 무차별적으로 동물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면 그들도 인간으로 변하고, 인간이 죽으면 곰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겨울잠을 자는 순간에는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물활론적 세계관입니다.
우리의 언어에는 '애완견'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 언어는 '반려견'이라는 언어로 변화해왔습니다. 물론 여전히 '애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완(玩)'은 완구(玩具)의 '완'과 같은 글자입니다. '희롱할 완(玩)'으로 '가지고 놀다', '업신여기다', '깔보다'와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변화는 단순한 용어의 교체가 아닙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반려종 선언(The Companion Species Manifesto)』에서 개를 포함한 동물들을 '반려종(companion species)'이라는 개념으로 재정의합니다. 해러웨이에게 반려종은 단순히 함께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진화하고 공동으로 역사를 만들어온 '함께-되기(becoming-with)'의 파트너입니다. 이는 인간 중심적 위계를 해체하고, 종(種)을 넘어선 상호의존과 책임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애완'의 개념은 동물을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수동적 대상으로 위치시킵니다. 반면 '반려'의 개념은 해러웨이가 말하는 '응답능력(response-ability)', 즉 서로에게 응답하고 책임지는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반려종 관계는 일방적 소유가 아니라 상호적 돌봄과 취약성의 공유를 의미합니다.
우리 삶에서 반려의 개념으로 함께 하게 된 존재를 여전히 '애완'의 개념으로 대할 때, 그 결과는 명백합니다. 버려지는 유기견들이 양산되고, 심지어 학대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언어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구조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애완견'에서 '반려견'으로의 언어적 전환은, 해러웨이가 제안하는 종을 넘어선 윤리적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곧 우리가 맺는 관계의 질을 결정합니다. 저는 이런 사유를 회복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태초의 문해력, AI 시대를 살아가는 힘
최초의 철학적 사고의 불꽃은 약 3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조상들은 무덤을 만들고, 죽은 사람을 매장했으며, 고인돌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유는 신석기 혁명을 거쳐 농경사회로 이어졌고, 신화로, 민담으로, 문학으로 흘러왔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인지와 지성의 영역에서의 문해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감각적이고 무의식 영역에서의 문해력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문해력은 단지 글을 읽고 쓰는 기술적인 능력에 그치지 않습니다. 문해력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유동적 사고를 훈련하고, 세상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는 능력입니다.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은 단순히 책을 읽고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내고, 이를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마치 신화 속의 주인공이 여러 상황을 직면하고 그 속에서 지혜를 얻어내듯, 독자도 문학이나 철학을 통해 세상의 복잡한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사고의 틀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작금의 시대, 저는 다시 신화적 사유가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그 지점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라는 새로운 범선 앞에서, 우리는 마야 문명의 추격자들처럼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채 사라질 것입니다.
문해력을 이야기하는데 인류의 위기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억측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문해력이라는 강력한 생각의 도구를 얻으실 것입니다. 오늘 저녁, 여러분의 아이가 인형과 대화하는 모습을 관찰해보세요. 조용히 앉아서 물어보세요. "그 친구 이름이 뭐야? 오늘 기분은 어때?"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그 순간, 여러분의 아이는 3만 년 인류의 지혜를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동적 사고를 연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와 관계 맺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 인간은 이미 세계를 읽고 있었습니다. 신화를 통해, 의례를 통해, 이야기를 통해. 그 방식이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었습니다. AI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닙니다. 더 빠른 검색 능력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를 읽어내는 능력,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세계와 대화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태초의 문해력이며, 인류 최초의 철학입니다. 3만 년 전 동굴 벽화를 그리던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지금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짜 문해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