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
— 헤라클레이토스
계속해서 인류가 가진 유동적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겠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접하신다면 우리 자녀들이 미래사회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방향성이 잡히실 겁니다. 문해력에 대한 새로운 마인드셋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접근을 해나가야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유동지능(Fluid Intelligence)'과 '결정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결정지능은 이미 축적된 지식, 경험, 공식을 의미하고, 유동지능은 새로운 문제를 직관과 패턴 인식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전통적인 교육은 결정지능을 강조했지만, 이제 AI가 이 영역을 완벽히 대체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문해력은 유동지능형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유동적 사고를 폭발적으로 개방해야 합니다. 이런 유동적 사고는 지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논리를 바탕으로 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듭니다. 그 사람은 예의 바르게 말하고, 정중하게 행동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당신의 몸은 경계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직감이 맞았습니다. '사기꾼'이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오늘 재미있었어"라고 말하지만, 엄마는 압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목소리의 톤, 가방을 내려놓는 모습, 눈을 마주치지 않는 태도 등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모든 것을 신호로 포착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원시시대의 조상이 미개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유동적 사고의 핵심은 서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대상에 연결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인터넷에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해서 세상과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허상에 사로잡혀 모두 죽은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죽은 사고를 경계해야 합니다.
산업화가 만든 분업의 덫
인간의 뇌는 본래 정적인 구조물이 아닙니다. 신경과학이 밝혀낸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은 우리의 뇌가 끊임없이 재배선되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우리는 이 유동적인 뇌를 의도적으로 고정시켜왔습니다. 대량생산 체제가 요구한 분업화는 조직을 세분화했고, 교육 시스템은 '고정된 지식'과 '정답 중심의 사고'를 강화하며 인간의 뇌를 일종의 하드디스크형 뇌로 길들였습니다.
산업화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분업화입니다.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생각해봅시다. 한 노동자는 평생 나사만 조입니다. 다른 노동자는 평생 문짝만 달고, 또 다른 노동자는 평생 바퀴만 끼웁니다. 각자는 자기 부분에서 완벽한 숙련공이 되지만, 아무도 자동차 전체를 만들 줄 모릅니다. 산업화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이 전체 공정을 통해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의 뇌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직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기획팀은 "우리는 전략만 세우면 돼, 실행은 현업 팀 일이지"라고 말합니다. 현업 팀은 "기획팀은 현실을 몰라, 우리가 더 잘 알아"라고 반박합니다. 마케팅은 영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업은 마케팅을 원망합니다. 각 부서는 자기 영역의 논리와 언어로만 생각합니다.
공무원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원인이 "이 문제는 어느 부서에서 처리하나요?"라고 물으면, A과는 "그건 B과 소관입니다", B과는 "그건 C과 업무입니다"라며 서로 떠넘깁니다. 병원도 똑같습니다. 내과 의사는 환자의 위장만 봅니다. 정형외과 의사는 뼈만 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마음만 봅니다. 하지만 환자는 하나의 몸입니다. 위장의 문제가 스트레스에서 왔고, 스트레스가 허리 통증을 만들고, 허리 통증이 다시 우울증을 부른다는 것을 누가 볼 수 있습니까? 전문화는 효율을 높였지만, 전체를 보는 눈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시스템은 관료제였습니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정의한 근대 관료제는 명확한 위계, 문서화된 규칙, 전문화된 역할 분담을 특징으로 합니다. 관리자가 분업화된 영역을 관리해왔습니다. 기획부서, 인사부서, 재무부서, 생산부서—각각은 자기 영역의 전문가가 되었지만, 동시에 자기 영역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영역 간에 벽이 생겼습니다. 정보는 공유되지 않았으며, 협업은 '남의 일'이 되었습니다. 한 부서에서 발견한 혁신적 아이디어가 다른 부서로 흐르지 않고, 조직 전체의 목표보다 부서의 이익이 우선시되었습니다. 결과는 명백했습니다. 의사결정 단계는 늘어나고 조직의 움직임은 둔화되었습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이를 "조직의 경화증"이라 불렀습니다.
최근의 조직들은 이런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가볍고 빠른 조직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애자일(Agile) 조직, 홀라크라시(Holacracy), 네트워크형 조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질은 같습니다. 경계를 허물고, 위계를 줄이고, 유동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구조조정은 필수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살아남겠습니까? 자기 영역만 고집하는 전문가입니까? 아닙니다. 전체를 보고, 벽을 허물고, 분절된 영역을 유동적 사고로 연결해 확장하는 사람입니다. 마케팅을 하면서도 재무를 이해하고, 개발을 하면서도 고객 경험을 생각하며, 자기 부서의 성과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AI 시대, 유동적 사고가 답이다
더 나아가, AI 시대에는 이런 유동적 사고가 더욱 결정적입니다. AI는 데이터 분석, 패턴 인식, 반복 작업에서 이미 인간을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AI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영역을 연결하고,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맥락을 이해하며 전체를 조망하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를 봅시다. 그는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서 혁신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서예 수업에서 배운 타이포그래피가 매킨토시의 아름다운 폰트가 되었고, 선(禪) 사상이 아이폰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동적 사고입니다. 전체를 보고, 분절된 영역을 연결하는 사람이 AI를 활용해 더 큰 가치를 만듭니다. AI에게 "마케팅 데이터와 고객 서비스 데이터를 연결해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찾아줘"라고 질문할 수 있는 사람. AI가 제시한 답을 "이것을 저 분야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라고 확장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AI 시대의 가치를 만듭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너는 문과니까 수학은 포기해"라고 말합니다. 일찍부터 영역을 나누고 전문화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미래는 정반대를 요구합니다. 과학자가 글을 잘 쓰고, 예술가가 데이터를 이해하고, 경영자가 철학을 사유할 때, 진짜 혁신이 탄생합니다. 조직의 미래, 개인의 미래는 유동적 사고에 달려 있습니다. 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고, 영역을 연결하는 능력. 이것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의 근간이 바로 새로운 문해력입니다. 관료제의 시대는 가고 있습니다. 네트워크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야생의 사고를 깨우고, 유동적 사고를 훈련하고, 새로운 문해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갈 유일한 길입니다.
레고와 요리로 보는 유동적 사고
제가 바라는 것은 유동적인 사고를 통해 깨진 유리조각처럼 파편화된 체계 속에서 그것들을 다시 연결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레고를 조립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아이는 친구들을 불러와서 "너는 바퀴 만들어, 너는 지붕 만들어" 이렇게 분업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완성합니다. 블록이 안 맞으면 빼고, 다시 끼우고, 무너지면 다시 쌓습니다. 사실 아이에게 완성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조각들이 어떻게 서로 맞물리고 연결되어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지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동적 사고입니다.
요리도 생각해봅시다. 공장에서 만드는 즉석식품은 완벽히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한 라인에서는 야채만 자르고, 다른 라인에서는 양념만 만들고, 또 다른 라인에서는 포장만 합니다. 효율적이지만 아무도 전체 요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면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재료를 고르고, 손질하고, 양념을 만들고, 불 조절을 하고, 간을 맞추는 전 과정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재료가 없으면 대체하고, 실패하면 원인을 알고,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동적 사고입니다.
저는 어릴 적 라디오를 분해하거나 멀쩡한 가전제품을 분해해 혼난 기억이 많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호기심에 카메라 렌즈를 분해하다 폐기한 적도 있습니다. 이는 단순 호기심이 아니라 유동적 사고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너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떤 체계로 작동하는지 말이죠. 그런데 이런 아이들의 호기심은 학교라는 거대한 조직에 들어가면서 억압됩니다.
학교가 죽인 사냥꾼의 뇌
학교에서는 서로 분절된 교육을 받습니다. 톰 하트만(Thom Hartmann)이 『ADHD: A Hunter in a Farmer's World』에서 제시한 사냥꾼-농부 가설은 이를 더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고대의 사냥꾼은 끊임없이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주변의 모든 감각 정보가 생존과 직결되었습니다. 원거리에서 들리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초목의 미세한 동요, 기류의 변화 등 이 모든 것이 사냥감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이자, 때로는 포식자의 접근을 경고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주의산만'은 결함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단일 대상에 대한 집중이 아니라 전체 환경에 대한 감지 능력, 이것이야말로 사냥꾼의 본질적 특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이런 사냥꾼의 뇌를 가진 아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ADHD가 탄생하게 되고, 사냥꾼의 뇌를 가진 아이는 그 범주에 들어가 억압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농부의 존재 방식은 근본적으로 상이했습니다. 농부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장기적 계획을 실행합니다. 파종, 관개, 제초, 추수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인내와 꾸준함, 그리고 무엇보다 단일 과업에 대한 지속적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농경사회의 성공은 변동성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 충동성이 아니라 계획성, 광범위한 주의 분산이 아니라 협소하고 심층적인 집중력에 의존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분절시키고, 서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학교 자체가 사회 시스템의 분업화를 위한 인간을 양산하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규명한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의 작동을 우리는 여기서 목격합니다. 학교 시스템 속에서 유동적 사고는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학교 시스템에 방해가 됩니다.
교실 환경을 고찰해보십시오. 학생들은 지정된 좌석에 착석해야 하며, 45분 내지 50분 동안 단일 주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교사의 설명을 정숙하게 청취하고, 정해진 순서대로 활동을 수행하며, 충동을 억제하고, 질문은 거수 후 허가를 득한 이후에만 가능합니다. 사냥꾼의 뇌를 가진 아이들을 병으로 규정하고, 약을 먹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집중력에 도움이 된다며 멀쩡한 아이에게 ADHD약을 먹이는 부모도 만났습니다. 사회의 체제와 시스템에 따라 우리가 태초부터 지니고 태어난 능력을 스스로 밟아 버리고 있습니다.
야생의 사고: 신화가 보여주는 유동적 지성
우리에게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신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 구전되어오는 신화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유동적 사고의 산물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야생의 사고(La Pensée Sauvage)'는 바로 이것입니다.
문명화된 논리 이전의 감각적, 비체계적, 유연한 사고. 이것은 '비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지각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사고'입니다. 이는 분석적 논리 이전의 감각적이고, 비체계적이며, 지극히 유연한 사유 방식입니다. 이를 '비이성적 사고'로 폄하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는 '언어 이전의 지각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이며 창조적인 사고'입니다.
이러한 '야생의 사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우리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분석적 사고는 '대지'와 '하늘'을 독립된 물질적 요소로 분리하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신화적 사유는 다릅니다. 태초의 여신 가이아(Gaia, 대지)는 홀로 우라노스(Uranus, 하늘)를 낳습니다. 여기서 대지와 하늘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하나의 가족 관계, 즉 '연결된'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는 세상을 분석 이전에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지각한 결과입니다.
가이아는 아들인 우라노스와 결합하여 만물을 잉태합니다. 이것이 어찌 비이성적인 이야기이겠습니까? 이는 하늘이 대지를 덮고 비를 내려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현상을, 고대인들이 '하늘(남성)과 대지(여성)의 성적인 결합'이라는 가장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논리로 파악한 것입니다. 언어 이전의 지각이 세상을 설명하는 장대한 서사가 된 것입니다.
이 사유의 절정은 아프로디테(Aphrodite)의 탄생입니다.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의 명을 받아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바다에 던집니다. 그 잘린 성기 주변으로 거품(Aphros)이 일었고, 바로 그 거품 속에서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탄생합니다. 문명화된 논리, 즉 인과율에 기반한 이성적 사고로는 이 전개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거세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 혼돈의 바다, 형태 없는 거품이라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충돌하여, 어떻게 절대적 사랑과 아름다움이라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탄생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야생의 사고'의 본질입니다.
'야생의 사고'는 "A는 B이다"라는 선형적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강력한 감각적 이미지들(피, 바다, 거품)을 과감하게 충돌시키고 융합함으로써, '사랑'이라는 가장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개념을 '탄생'시킵니다.
이처럼 신화는 비이성적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세상을 분절시키지 않고 감각적으로 연결하며 사유했던 인류의 유동적 지성이 빚어낸 위대한 창조적 유산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은 지성을 해체하고, 유동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리좀에서 수목으로: 신들의 죽음
그런데 신화를 통해 탄생한 신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국가가 탄생하면서 권력은 중앙집중화되었고, 하나의 질서가 필요해졌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신들의 세계는 단순하고 명확한 '유일신'의 체계로 대체되어야 했습니다. 인간 지성의 충만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신화의 신들은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가 말한 '리좀(rhizome)'의 세계에서 '수목(tree)'의 세계로 전환된 것입니다. 리좀은 뿌리줄기처럼 수평적으로 뻗어나가며 어디서든 연결되고 끊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반면 수목은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해 위계적으로 가지를 뻗는 구조입니다. 중심과 위계가 생기고,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되며, 하나의 진리만이 인정받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유동적 사고의 피로감 때문에 스스로 파티션과 칸막이를 만들어 더 이상 뒤섞일 필요 없이 안위하며 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동적 사고를 막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댐으로 가두었던 수천 톤의 물이 견고한 댐을 부수고 쏟아져 나와 저수지의 물과 만나고, 더 큰 파도와 풍랑을 만들어 못에 갇혀 있던 물과 하나로 뒤섞이는 것처럼, 유동적 사고는 그 자체로 격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를 정적으로 만드는 지성의 작용이 우리를 흐르지 못하게 합니다. 죽어있는 사유를 하는 것이죠. 우리 인류의 역사는 '유목'하는 삶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비율로 따지자면 현생 인류 역사의 약 96%가 유목 생활 기간이었으며, 농경 사회 기간은 약 3~4%에 불과합니다.
1차 뇌와 2차 뇌의 재결합
AI 시대는 고정된 뇌의 시대를 종료시키고 있습니다. AI는 이미 지식의 저장과 연산에서 인간을 압도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뇌가 살아남으려면 기억보다 연결로, 정답보다 상상으로, 축적보다 흐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동적 사고'입니다.
인류는 수백만 년을 수렵채집인으로 생존했으며, 불과 만 년 전부터 농경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뇌 구조, 신경계, 본능적 반응은 대부분 그 장구한 사냥꾼의 시간 동안 형성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부적응'으로 간주되는 특성들이 사실은 인간 본성의 더 심층적인 층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가진 본능적인 사냥꾼의 뇌, 즉 야생의 사고를 깨워야 할 때입니다.
이를 인류 뇌혁명의 관점에서 보면, 유동적 사고는 1차 뇌(감정·직관)와 2차 뇌(논리·언어)의 재결합을 의미합니다. 1차 뇌는 감각, 정서, 본능을 담당하며 원시적 사고와 생존에 관여합니다. 2차 뇌는 분석, 추론, 해석을 담당하며 문명적 사고와 효율을 추구합니다.
문제는 1차 뇌는 감정적 오류에 빠질 수 있고, 2차 뇌는 창조의 결핍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인류 뇌혁명은 바로 이 감정과 이성이 다시 손을 잡는 사건이며, 유동적 사고는 그 두 영역의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AI는 논리적 사고, 즉 2차 뇌의 기능은 이미 수행하지만, 감각과 정서를 통합한 유동적 사고, 즉 1차 뇌와 2차 뇌의 혼합은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 고유의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유동적 사고의 데이터는 AI가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DNA 속에 암묵적으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로 설명이 되지 않는 거대한 데이터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해력: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힘
아이러니하게도 유동적 사고를 방해하고, 죽은 사유를 하게 만드는 곳이 학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수능으로 아이들을 경쟁시키고, 등급화하는 방식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교육 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식론적 정의(epistemic justice)의 문제입니다. 인식론적 정의란 '앎의 방식'에도 정의가 필요하다는 원칙입니다. 어떤 아이는 책상에 앉아 집중하며 배우고, 어떤 아이는 움직이며 배우고, 어떤 아이는 전체를 관찰하며 배웁니다. 그런데 현재 교육 시스템은 오직 하나의 '앎의 방식'만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나머지는 결함으로 취급합니다.
사냥꾼의 뇌를 가진 아이가 환경 전체를 감지하는 능력은 "주의산만"이 되고, 신체 지능이 뛰어난 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세상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고유한 방식 자체를 부정하는 인식론적 폭력입니다. 모든 학생은 자신의 인지적 특성에 상응하는 학습 방법론에 접근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식론적 정의의 핵심입니다. 한 아이에게 약을 먹여 책상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앎의 방식'을 존중하고 그에 맞는 배움의 경로를 제공하는 것. 이는 단순히 교육적 배려가 아닙니다. 한 존재가 자신의 인지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할 권리, 즉 '인식론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한 존재의 대체불가능성을 획득하는 길이자, 다양한 인지 방식을 가진 인재들이 각자의 강점을 발휘할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한 국가의 진정한 경쟁력입니다. 유동적 사고란 고정된 지식의 틀을 넘어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의미를 '다시 구성하는 능력'입니다. 어떤 지식은 끝내 마침표를 찍고 맙니다. "학교에서 배웠다", "교수님이 그렇게 말했다", "어떤 연구에서 그런 결론이 났다"는 권위의 오류로 그것을 진리라 믿고 더 이상 사유의 흐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고여 있는 물은 썩습니다. 감각적으로 경험한 지식을 다른 지식과 연결해 유동적 사고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누군가는 미신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 하지만 우리 무의식의 작용은 이미 유동적 사고를 통해 수천 가지 신호를 연결하고, 패턴을 감지하며, 언어 이전의 진실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직관입니다. 이것이 야생의 문해력이자 과학 이전의 과학인 것입니다. 유동적 사고는 야생적 사고를 현대의 뇌과학과 철학으로 이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즉, 유동적 사고는 인간이 다시 야생의 감각을 회복하여 인공지능이 모방할 수 없는 창조적 사고의 흐름으로 복귀하는 과정입니다.
문해력은 이제 '정확한 독해 능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맥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문해력은 모든 학문의 기본적인 전제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것을 엮고, 다른 분야를 통섭하며 '어떻게 사유하는가'를 연습할 수 있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언어체계로 작동하는 AI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이를 해체하고 다시 결합하는 문해력이야말로 교육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앞으로 '질문'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 맥락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정해진 답을 찾는 질문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질문 말입니다.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AI 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되는 것입니다.
AI가 만든 언어의 홍수 속에서 의미의 결을 읽고, 재배치하고, 새 언어로 변환하는 것. 이것은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동적 해석의 능력입니다. 유동적 사고는 AI 시대 문해력의 본질입니다. 문해력이란 언어의 강을 따라 흐르며 세상과 자신을 다시 해석하는 유동적 뇌의 움직임입니다.
진정한 인간 공동체는 동일성의 공동체가 아니라 다원성의 공동체(community of plurality)입니다. 사냥꾼도 필요하고 농부도 필요합니다. 광범위하게 관찰하는 시선도 필요하고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시선도 필요합니다. 충동적 결단도 가치 있고 신중한 숙고도 가치 있습니다.
흐르지 않으면 죽은 사고이듯, 고여 있으면 썩은 문해력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도, 우리의 문해력도 끊임없이 흘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흐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니, 흐르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