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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를 구원하는 문해력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남긴 이 문장은, 단순한 은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언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어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현장에서 상담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변화를 위한 방법론을 배우기 위해 현대 상담심리학 이론을 모두 공부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통찰을 준 것은 실존주의심리치료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유동적 사고에 대한 부분을 전혀 몰랐지만 심리상담에 머문 것이 아니라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문학에 다다라 문학작가 공부를 하면서 야생의 사유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아무튼 실존주의를 통해 비로소 '언어'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라 불리는 하이데거의 주된 관심사는 '존재(Sein) 자체'였습니다. 그는 "왜 무(無)가 아니고 존재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우리에게 도달하는 방식,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바로 '언어'라고 보았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그의 선언은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이데거는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어가 말한다(Die Sprache spricht)." 인간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가 언어라는 집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어를 통해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존재의 소리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건네는 말속에서 아이의 존재가 드러나고, 세계가 열리고, 관계가 생성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드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언어'라는 집 안에서 살아갑니다. 아이가 처음 "엄마"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달라집니다. 그 이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세계는 같지 않습니다. 단어 하나가 관계를 만들고, 관계가 세계를 만듭니다.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가 두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고,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가 무너진 마음에 기둥을 세웁니다. 반대로 "틀렸어"라는 말은 누군가의 세계를 흔들고, "넌 안 돼"라는 말은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곧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이자 존재의 집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건네는 말의 질감이,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의 질감을 결정합니다.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속에서 자란 아이와, "넌 쓸모없는 녀석이야"라는 말속에서 자란 아이가 살아가는 존재의 집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문해력은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기술이 아닙니다. 내가 갇혀 있는 존재의 집을 무너뜨리고 다시 지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인 것입니다. 세계를 짓는 능력이며, 관계를 만드는 능력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능력입니다.



황폐해진 언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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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우리의 언어는 변했습니다. 아니, 무너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대인의 일상 언어를 ‘잡담(Gered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잡담은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리고’, ‘은폐’한다고. 말은 많지만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습니다. 정보는 교환되지만, 존재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는 언어를 효율의 도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목표”, “성과”, “혁신”, “효율”, “데이터” — 이것이 우리가 매일 조직에서 듣는 말들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언어마저 분석과 통제의 도구로 변질시켰습니다. 언어는 더 이상 존재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정보를 전달하고, 목적을 달성하고, 결과를 산출할 뿐입니다.

“오늘 학교에서 뭐 했어?”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냥요.” “숙제는 했니?” “했어요.”


대화가 끝났습니다. 아니, 어쩌면 대화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보의 교환일 뿐, 존재의 만남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잡담’입니다. 부모의 언어가 점검과 확인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 아이의 언어도 보고와 응답의 언어로 축소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진행 상황 공유드립니다.” “빠른 회신 부탁드립니다.” 정중하지만 건조한 언어, 효율적이지만 공허한 언어입니다. 그 속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조직의 언어’가 가정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학습지는?”, “학원 과제 제출했어?”, “다음 주 시험 준비는?” 이것은 관리자의 언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가 아닙니다. 저는 2021년부터 북클럽다이브를 운영하며 이 언어의 황폐함을 더 깊이 목격해 왔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정의 자녀들,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일곱 개의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 겉으로는 모범적이지만 그들의 내면은 사막과도 같았습니다. 대화는 있었지만, ‘대화의 온도’는 없었습니다. 말은 오갔지만, 그 말속에 ‘존재의 숨결’은 없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은 바로 이런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가 존재를 잊어버린 것, 그것은 곧 ‘말의 상실’입니다. 우리가 말을 잃는 순간, 세계도 함께 무너집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그런데 그 집이 차갑고 황폐하다면, 아이들은 그 안에서 진정으로 숨 쉴 수 없습니다.


아이들의 또래문화 속에도 이 황폐한 언어가 스며듭니다. ‘휴거’, ‘엘사’, ‘개근거지’ 같은 단어가 타인의 존재를 납작하게 짓밟습니다. 우리 사회의 ‘수저계급론’ 역시 이와 같은 언어의 구조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언어가 만든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이가 차별이 되고, 말이 낙인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문해력’입니다. 문해력이란 그런 언어의 프레임을 해체하는 힘입니다. 언어를 새롭게 읽고, 그 언어 속에서 다시 존재를 되찾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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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을지 모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언어를 도구로, 방법론으로 다루려는 태도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언어를 너무 쉽게 소비합니다. 사교육 시장은 문해력을 '기능'으로 치환하고, '초등 필수 어휘', '국어력 향상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으로 판매합니다. 언어는 상품이 되었고, 문해력은 경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해력의 회복은 더 많은 단어를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언어가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도구가 아닌 관계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없었을까요? 흥미롭게도, 하이데거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출발한 철학자가 비슷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생물학 박사 출신의 과학기술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response-ability'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책임(responsibility)'과 '응답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respond)'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응답능력'은 단순히 반응하는 힘이 아닙니다. 타자의 존재에 귀 기울이고, 그 존재의 부름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능력입니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부름을 듣는다"라고 했다면, 해러웨이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이고, 하나는 관계론적이지만, 둘 다 언어를 도구가 아닌 '만남의 장'으로 봅니다. 진짜 문해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읽고 쓰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아이가 "엄마, 나 속상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보가 아니라 부름입니다. 그 부름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언어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이 응답은 자기 삶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타자와 세계에 대한 책임으로 확장됩니다. 그것은 점수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이 문해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생성형 AI는 놀랍도록 유창하게 글을 씁니다. 문법도 완벽하고, 논리도 정연합니다. 그러나 AI에게 언어는 여전히 패턴이고 확률입니다. 어떤 단어 뒤에 어떤 단어가 올 가능성이 높은 지를 계산할 뿐, 누군가의 "엄마, 나 속상해"라는 말이 품은 떨림을 느끼지 못합니다. AI는 응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측할 뿐입니다. 존재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불렀고, 해러웨이는 언어를 '응답의 관계'로 확장했습니다. 문해력은 이 두 사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롭게 정의됩니다. 문해력이란, 텍스트를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세계의 부름에 응답하는 능력입니다. 문해력의 회복은 결국 응답하는 인간으로의 회복입니다. 세상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이 아니라, 세상의 부름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응답 안에서 언어는 다시 살아 움직이고,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기능을 넘어, 존재를 품는 집이 됩니다.



AI 시대, 인간만이 가진 언어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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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AI가 말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유창하게, 정확하게, 빠르게 말합니다. ChatGPT는 질문에 즉시 답하고, 번역기는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음성 비서는 친절하게 응대합니다. 그런데 AI의 언어에는 무언가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정보이지만,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확하지만, 살아 있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 문명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려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언어마저도 목적을 위한 도구, 효율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고 말입니다. AI의 언어는 바로 이 '기술적 언어'의 완성형입니다. 완벽하게 계산되고, 최적화되고, 목적에 부합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 언어는 존재의 부름을 듣지 못합니다.


AI는 언어를 생성하지만, 언어가 스스로 의미를 드러내도록 기다리지 못합니다. 프롬프트에 따라 답을 만들어낼 뿐, 침묵 속에서 진실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그와 다릅니다. 정보가 아니라 정서이며, 기능이 아니라 관계이며, 데이터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같은 "미안해"라는 말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갖습니다. 어떤 미안함은 관계를 회복하고, 어떤 미안함은 상처를 더 깊게 합니다. 이것이 인간 언어의 윤리입니다. 인간은 존재하기에, 책임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의 문해력은 '정보를 빠르게 읽고 처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를 느끼고 살리는 능력'입니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문해력 교육은 더 많은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이에게 천 개의 단어를 외우게 하는 것보다, 한 문장을 진심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의 무게를.

"미안하다"는 말의 책임을.

"함께 있다"는 말의 온기를.


언어를 다시 인간의 집으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AI 시대 문해력의 핵심 과제입니다.



문해력으로 짓는 존재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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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기술이자, 인간이 머무는 가장 깊은 집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나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다시 회복합니다. 첫울음도 언어였고, 마지막 작별도 언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의 언어는 효율과 데이터의 언어로 변해버렸습니다. 말은 빨라졌지만 가벼워졌고, 정확해졌지만 메말랐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말하지만, 더 적게 전달합니다.


이제 다시 존재의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거주하는 공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건네는 한 문장이 세계를 짓는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대화를 할 때도 부모의 언어가 아이의 내면을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존재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성급한 조언이나 판단이 아니라 진심 어린 귀 기울임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해력의 회복입니다. 언어가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언어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만듭니다. 아이와 나눈 오늘의 대화가 내일 아이가 살아갈 세계를 짓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다정하다면, 아이가 살아갈 세계도 다정할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책임 있다면, 아이도 책임 있는 존재로 자라날 것입니다.


문해력은 결국 이것입니다. 단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에 존재를 담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야말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진 가장 고유한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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