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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창조하는 문해력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



이 책을 쓰는 유일한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 아이들이 '대체불가능한 독보적인 존재'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창조자가 되는 것이고, 자기 분야의 아키텍처가 되는 것입니다. 문(文)을 해체하는 것이 진정한 문해력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헤세의 문장은 인간의 정신적 성장, 그리고 사유의 탄생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구절입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탄생이 아니라 존재의 탈출입니다. 그가 깨뜨린 알은 보호막이자 감옥이며, 안정이자 한계이고, 익숙함이자 구속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공간의 시학』에서 '껍질(shell)'의 이중성을 이야기합니다. 껍질은 우리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세계와 단절시킵니다. 성장이란 바로 이 껍질을 깨고 나오는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이 책이 정의하는 '문해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페다고지』에서 "읽기"를 "세계 읽기(reading the world)"로 확장했습니다. 진정한 문해력은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너머의 권력구조, 이데올로기, 억압의 메커니즘을 읽어내는 힘입니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수동적 독자에서 능동적 창조자로 변모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말한 탈영역화(deterritorialization) 역시 이와 닮아 있습니다. '영역화'가 기존의 질서, 구조, 정체성을 고정시키는 힘이라면, '탈영역화'는 그 고정된 의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여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도망치는 행위가 아니라, 낡은 질서가 부서진 자리에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적 이동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사과"라는 단어를 배웁니다. 처음에는 빨간 과일을 가리키는 기호로 인식합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건 사과 ~' 이런 노래도 배우죠. 이것은 영역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사과를 뉴턴의 사과, 백설공주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애플을 접하면서, "사과"는 중력, 유혹, 혁신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망으로 확장합니다. 이것은 탈영역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과는 폴 세잔의 사과입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진 '단일 소실점 원근법'이라는 위계적이고 억압적인 '영역'을 '탈영역화'시켰으며, 그의 캔버스를 중심도 없고 위계도 없는 '리좀'적 공간으로 재창조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탈영역화는 항상 "재영역화(reterritorialization)"를 동반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탈영역화는 새로운 영역화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탈영역화의 계기가 됩니다. 세잔의 혁명은 입체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것은 변증법적 운동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becoming)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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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파 이후는 어땠을까요? 입체파는 세잔이 무너뜨린 '단일 시점의 재현'이라는 영토 위에 '대상의 다각적 분석'이라는 강력한 새 영토를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토는 '그림이란 여전히 실재하는 대상을 다루어야 한다'는 마지막 규칙에는 묶여 있었습니다. 이때, 칸딘스키나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추상 미술'이 입체파의 이 영토를 결정적으로 '탈영역화'합니다. 추상 미술은 "왜 그림이 무언가를 닮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며, 입체파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대상' 그 자체로부터 도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탈주를 통해, 추상 미술은 '점, 선, 면, 색채라는 순수 조형의 세계' 혹은 '내면의 감성을 직접 표현하는 순수 감성의 세계'라는 또 다른 새로운 영토를 '재영역화'한 것입니다. 이처럼 미술의 역사는 고정된 영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토를 만들고(재영역화), 다시 그곳에서 탈주하는 끊임없는 운동으로 전개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끊임없는 생성을 위한 '문해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만의 사과로 전혀 새로운 영역을 탄생할 수 있는 것이죠. 문해력은 고정된 의미에서 탈주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문해력, 세계를 깨뜨리는 강력한 도끼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한때 현대상담심리학을 모두 공부했습니다. 그 마지막 단계가 자신의 인간관과 문제론, 조력론을 반영한 상담이론을 직접 만들어보는 수업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경험은 아직도 제 안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만든 상담이론의 이름은 '매트릭스(MATRIX) 이론'입니다. 지금도 이 이론을 기반으로 상담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상담이론의 명칭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주인공 네오(NEO)는 모피어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가상세계에 산다는 것을 깨닫고 탈출합니다. 그 후 기계와 싸우며 시온을 구하며 자신이 바로 메시아(ONE) 임을 자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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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빨간 약과 파란 약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장면은 저에게 존재론적인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저는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떠올립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가상의 세계에서 깨어나 실제 세계로 눈을 뜨는 네오의 모습은 들뢰즈가 말한 탈영역화의 결정적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언어, 질서, 규칙, 세계관을 인식하고, 그 구조를 스스로 깨부수며 새로운 실존의 지평으로 이동합니다. 그것은 바로 헤세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장면과 겹칩니다. 두 장면 모두 세계의 파괴를 통한 탄생을 보여줍니다.


문해력은 바로 이런 탈영역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문해란 글자를 해독하는 기술이 아니라, 언어와 구조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자각하고, 그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의미의 길을 만들어내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일이 아닙니다. 텍스트 속 세계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이 만들어낸 '기표의 알'을 스스로 깨뜨리는 일입니다. 언어를 해체한다는 것은 곧 사유의 탈영역화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기존의 나'라는 세계를 조금씩 해체하고 다시 태어납니다. 교육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경험의 연속성(continuity of experience)"을 강조했습니다. 진정한 학습은 고립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경험과 경험이 연결되면서 의미가 확장되는 과정입니다. 리좀적 문해력은 바로 이런 연결의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면에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문해력은 유동적 사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사고가 닫힌 '나무(수목형) 구조'처럼 이분법적이고 분절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문해력이란 텍스트의 닫힌 문법(규칙) 안에서만 의미를 생성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텍스트를 사회, 정치, 역사, 경제 등 외부의 '잡다한 코드들'과 자유롭게 '연결접속'시키는 리좀(Rhizome)적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경직된 '수목형 사고'에서 벗어나 '리좀적 읽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은 그 강력한 방법론적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후설은 "에포케(epoché)", 즉 '판단 중지'가 모든 선입견과 기존의 태도를 괄호 안에 묶어두고 '사태 자체'로 돌아가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문해력에서도 이 '에포케'는 결정적인 첫걸음이 됩니다. 우리는 "이 글은 이런 의미여야 한다"거나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성급한 이분법적 선입견을 먼저 '중단'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존의 판단을 괄호 안에 묶어둘 때, 비로소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바에 온전히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텍스트가 표면적으로 말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숨기고 있는 것,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들, 즉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연결망(리좀)'을 읽어낼 수 있는 진정한 유동적 사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세계를 깨뜨리는 강력한 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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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의 핵심 중 하나는 탈기표작용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자와 언어를 통해 기표작용이 일어나면서 그 의미에 갇히게 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라고 했을 때 '공부하는 곳'이라는 상징으로 책과 연필만 떠올랐다면, 그것은 기표작용에 매몰된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저의 자녀들에게 학교라고 하면 '급식을 먹는 곳', '운동회를 하는 곳', '친구와 쉬는 시간에 노는 곳' 등 다양한 기표를 떠올립니다. 이것이 바로 탈기표작용입니다. 학교라는 문법을 완전히 파괴하며 이원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유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아동문학작품들입니다. 책 속의 다양한 주인공들은 기존의 틀을 깨는 탈기표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천개의 고원에서는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서술합니다. 여기서 분할선은 정확히 잘라서 구분하는 선입니다. 세상을 깔끔하게 정리해 줍니다. 하지만 사람을 틀에 가두는 선이기도 합니다. 도주선은 “도망간다”는 뜻이 있지만 들뢰즈가 말한 도주는 “벗어나는 힘”입니다. 문을 해체하는 문해력과 같은 것이죠.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분할선으로 지정한 것을 도주선으로 벗어납니다. 규칙의 창조에 위반이라는 선을 그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를 즐겨하죠. 어린이가 가진 힘이자 이미 문해력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아이들에게 이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아이들이 문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때, 그들은 이미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온 네오처럼 기존의 의미 체계를 넘어서는 도주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상은 리좀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끊어지더라도 다시 자라나는 탈영역화의 힘을 보여줍니다.


결국 문해력은 우리 안의 세계를 깨뜨리는 강력한 도끼입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읽기란 세계의 알을 깨는 행위이며, 그 순간 우리는 매트릭스의 가상에서 깨어난 네오처럼, 새로운 세계의 빛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문해력은 그 빛으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 사유의 가장 근원적인 탈영역화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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