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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읽는 힘 — 패턴의 문해력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우리는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본다.
— 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입체파 화가)



진정한 의미에서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눈앞에 놓인 기호를 인식하는 행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관계를 감지하고, 숨겨진 구조를 발견하며, 흩어진 조각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직관하는 고도의 지성적 행위입니다.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모든 지성은 관계를 인식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통찰은 오늘날 AI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단순한 정보의 처리와 저장은 이미 기계가 인간을 압도하고 있지만, 정보와 정보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읽어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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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혁명적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작곡가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는 음의 순서보다 음표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더 많다." 음악을 창조하는 사람은 개별 음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이완, 상승과 하강, 조화와 불협화음이라는 '관계의 구조'를 설계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끼고, 의미를 발견하며, 삶의 리듬을 감지합니다.


문해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문해력은 문장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의 관계를 읽는 능력입니다. 단어와 단어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연결의 실을 감지하고, 그 관계의 망 속에서 전체의 의미를 구성해내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의 핵심에는 바로 '패턴을 읽는 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패턴, 세계를 읽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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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패턴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패턴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언어의 구조, 감정의 리듬, 자연의 질서, 사회의 관습, 인간관계의 역학 등 이 모든 것 속에는 반복되고 변주되는 패턴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고,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을 거듭하며, 아기는 울음으로 배고픔을 표현하고 엄마는 그 신호를 알아차립니다. 이 모든 것이 패턴입니다. 감각이 분화 된 아이는 울음소리를 다르게 냅니다. 오직 양육자가 이런 패턴을 해석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배고플 때와 잠이 올 때 기저귀를 갈아야할 때의 울음소리가 다릅니다. 이 또한 패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러한 패턴을 감지하고 학습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저 움직임 패턴은 공격을 의미한다", "저 구름의 형태 패턴은 비가 온다는 신호다", "저 사람의 표정 패턴은 분노를 나타낸다"는 것을 읽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이 패턴 감지 능력이야말로 모든 창조적 지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입니다. 체스와 바둑의 귀재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수십 수 앞을 내다보며 승리를 거두는 것은 천부적인 암기력이나 계산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의 배치와 형세 속에서 '승리로 향하는 패턴' 혹은 '패배로 향하는 패턴'을 직관적으로 인식합니다. 수천 번의 대국을 통해 체화된 패턴 인식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복잡한 판세를 한눈에 꿰뚫어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음악적 패턴, 운동적 패턴, 시각적 패턴, 언어적 패턴—이 모든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탁월한 패턴 감지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교향곡의 전체 구조를 머릿속에서 한 번에 '본다'고 했고, 위대한 화가들은 사물의 형태 너머에 있는 빛과 그림자의 관계 패턴을 포착했으며, 훌륭한 작가들은 인간 심리의 반복되는 패턴을 이야기로 직조해냅니다.


아이들의 문해력이 '이야기의 연결'을 통해 발달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야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원인과 결과, 갈등과 해결, 욕망과 좌절이라는 '사건의 패턴'을 담고 있는 구조입니다. "옛날 옛적에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무도회에 가고 싶었지만 계모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정이 나타나 소녀를 도왔고, 소녀는 왕자를 만났습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는 이미 욕망, 장애물, 조력자, 성취라는 보편적인 서사 패턴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러한 이야기의 패턴을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내면화합니다.



AI 시대, 관계의 패턴을 읽는 문해력이 절실한 이유

그렇다면 이 패턴 감지 능력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아이들에게 왜 그토록 중요할까요?


첫째, AI는 데이터의 패턴은 찾아내지만, 인간관계의 미묘한 패턴은 읽어내지 못합니다. 기계는 통계적 상관관계를 계산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표정 뒤에 숨겨진 불안, 목소리 톤에 배어 있는 배려, 침묵 속에 담긴 저항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 고유의 영역은 바로 이러한 '관계의 패턴'을 읽어내는 데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지금 관계의 패턴을 읽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가스라이팅, 데이트 폭력, 교제 살인, 정서적 학대 등 이 모든 폭력의 형태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는 '억압의 패턴'입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통제로 시작해서, 점차 고립시키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며, 결국 상대의 실존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명확한 패턴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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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패턴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는 아이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할 때, 그 뒤에는 항상 이런 행동이 따랐어." "이 관계에서 내가 뭔가를 요구할 때마다 상대는 피해자 역할을 하며 나를 죄책감에 빠뜨리는 패턴이 있어." 이러한 인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생존의 감각입니다.


셋째, 우리가 일상에서 '눈치가 빠르다', '공감 능력이 높다', '사람을 잘 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관계의 패턴'을 읽는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 이면에 있는 진짜 의도를 파악하고, 집단 내의 권력 관계를 한눈에 꿰뚫으며, 갈등이 폭발하기 전에 그 징후를 포착합니다. 이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패턴을 분해하고 새로운 패턴을 창조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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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정한 '패턴의 문해력'은 단지 주어진 패턴을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더 높은 차원의 문해력은 하나의 패턴을 분해하면서 동시에 다른 패턴을 조립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동적 독해(Reading)를 넘어 능동적 창조(Creating)로 나아가는 핵심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한 아이가 자신이 속한 학급에서 반복되는 특정 패턴을 감지합니다. "선생님이 화가 났을 때는 항상 가장 조용한 아이를 지목해서 대답을 요구한다." "우리 반에서는 특정 친구들이 제안한 의견만 받아들여지고 나머지는 무시된다." "체육 시간마다 특정 아이들이 늘 팀에서 배제된다.” “최근에 친해진 친구는 내가 거절 했을 때 의도적으로 친구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나를 따돌리는 것 같다.”


이러한 패턴을 단지 '읽어내기만' 하는 아이는 그 패턴에 순응하거나 좌절합니다. 그러나 패턴을 분해하고 재구성할 줄 아는 아이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왜 이런 패턴이 반복될까?" "이 패턴을 만드는 보이지 않는 규칙은 무엇일까?" "만약 내가 다르게 반응한다면 이 패턴은 어떻게 변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아이는 더 이상 주어진 관계의 포로가 아닙니다. 그는 관계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 구조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탐색하며, 필요하다면 새로운 관계의 패턴을 '설계'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내가 속한 관계가 위계, 규칙, 혹은 일방적인 권력관계에 의한 '억압의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정한 문해력을 가진 사람은 그 패턴을 그저 감내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읽어낸(Read)' 후, 그 패턴을 분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스스로의 실존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관계의 패턴을 '창조(Write)'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동적 피지배자에서 능동적 설계자로의 전환입니다. '패턴을 만든다'는 것은 정해진 관계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관계의 지도를 그리는 '아키텍트(Architect)'가 되는 것입니다. 건축가가 공간을 설계하듯, 우리는 인간관계의 구조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문해력의 정점입니다.



패턴의 문해력을 키우는 실천적 훈련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에게 이러한 '관계를 읽는 힘', '패턴의 문해력'을 길러줄 수 있을까요? 몇 가지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법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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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같은 구조 찾기' 놀이를 일상화하십시오. 책을 읽은 후, 아이에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이 이야기랑 우리 가족 이야기랑 닮은 점은 뭐야?" "신데렐라가 계모한테 구박받는 이야기랑, 너희 반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비슷한 게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비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영역(동화 ↔ 현실 ↔ 감정 구조) 사이의 공통된 패턴을 발견하는 훈련입니다. 처음에는 표면적 유사성만 찾던 아이가, 점차 깊은 구조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신데렐라도 우리 반의 민수도 똑같이 '배제되는 패턴' 속에 있구나.“


둘째,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의 관계 구조를 시각화해보는 연습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함께 본 후,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도표로 그려보는 연습을 하십시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 누가 누구의 조력자인지를 선과 화살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관계 구조도'는 눈에 보이지 않던 인물들 간의 권력 관계, 감정의 흐름, 갈등의 근원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햄릿, 클로디어스, 거트루드, 오필리아의 관계를 도표로 그려보면, 복잡하게 얽힌 욕망과 배신, 조종과 희생의 패턴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의 구조가 한눈에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이는 이러한 훈련을 통해 "아, 복잡해 보이는 관계도 결국 몇 가지 기본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구나"라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셋째, 인간 행동의 동기와 욕망을 추적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작품 속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갈등 장면을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아이에게 이렇게 제안하십시오. "주인공의 시점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의 1인칭 시점으로 그 장면을 다시 써보자.“


예를 들어 『백설공주』에서 왕비가 백설공주를 죽이려는 장면을 왕비의 입장에서 다시 써보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 아름다움으로 인정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나보다 아름답다니... 내 존재의 의미가 흔들린다. 내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그 아이가 사라져야 한다.”와 같이 써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지만 그림형제의 민담집을 꼭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왕비의 욕망을 아이들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관계의 문해력을 발휘해 외부의 이야기와 내면을 순환하는 아이가 정신적으로 강한 아이가 됩니다.


더불어 이 훈련을 통해 아이는 악의적으로 보이는 행동 뒤에도 나름의 동기와 패턴이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해봄으로써 '하나의 사건에는 여러 개의 패턴이 중첩되어 있다'는 복합적 사고를 체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넷째, 일상 속에서 패턴 예측 놀이를 하십시오.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할 때, 혹은 TV를 볼 때,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물어보십시오. 드라마의 다음 장면을 예측하는 것도 좋고,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아빠는 보통 어떻게 반응하지?"처럼 가족 내 상호작용 패턴을 함께 관찰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맞히기 게임이 아닙니다. 이것은 "과거의 패턴을 인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전략적 사고 훈련입니다. 체스의 고수가 상대의 말 배치를 보고 몇 수 후를 예측하듯, 아이는 인간관계의 패턴을 보고 다음 전개를 예상하는 능력을 기르게 됩니다.



패턴을 읽는 자가 세계를 쓴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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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의 본질은 결국 '읽기'에서 '쓰기'로의 이행입니다. 주어진 텍스트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구조를 분해하며, 새로운 구조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쓴다는 것의 의미는 자신만의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패턴의 문해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세상이 이런 패턴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패턴을 만들며 살 것인가?" "내가 속한 관계에서 어떤 새로운 패턴을 설계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기계는 인간관계의 미묘한 패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계는 데이터를 처리하지만, 인간은 관계를 창조합니다. 기계는 정보를 나열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직조합니다. 기계는 과거의 패턴을 반복하지만, 인간은 새로운 패턴을 발명합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관계의 패턴을 읽어내고, 그 패턴 속에서 자신만의 위치를 창조하며, 필요하다면 전혀 새로운 패턴의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이가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아이가 아니라, 세계의 관계를 읽고 새로운 관계를 쓸 줄 아는 아키텍트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AI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문해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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