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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적 사유의 힘 - 리좀적 문해력으로 확장하기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우주에서 어떤 것 하나를 끄집어내려 하면,
그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존 뮤어(John Muir), 환경철학자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인간 고유의 역량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다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생각', '사고', 그리고 '사유'라는 세 가지 정신 활동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 세 단어를 혼용하지만, 그 깊이와 방향성은 완전히 다릅니다. '생각'은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장 일반적이고 즉각적인 정신 활동입니다. 잡생각, 아이디어, 기억 등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는 정신 활동의 원재료와 같습니다. 떠오르는 구름처럼 자유롭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의식의 흐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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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이 '생각'이라는 재료를 가져와 논리적,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입니다. 비판적 사고, 논리적 사고처럼 목적이 분명합니다. 문제를 '어떻게(How)' 효율적으로 풀지, 어떻게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지를 다룹니다. 사고는 잘 닦인 공장처럼 작동합니다. 원재료를 투입하면 정해진 공정을 거쳐 결과물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유'는 이 '사고'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사유는 '어떻게'가 아닌 '왜(Why)'와 '본질은 무엇인가(What)'를 묻는 활동입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처럼 답이 정해지지 않은 근원적인 의미를 깊이 파고드는 철학적 탐구입니다. 사유는 깊은 바다로의 잠수와 같습니다. 표면의 물결이 아니라 심연의 흐름을 찾아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사유'입니다.



AI는 사고하지만, 사유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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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AI, 특히 거대 언어 모델은 바로 '사고'의 영역에서 경이로운 능력을 보여줍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논리적 추론과 문제 해결안을 제시합니다. AI는 명백히 '사고'의 달인입니다. 수백만 권의 책을 읽고, 복잡한 수식을 풀며, 여러 언어를 번역하고, 정교한 코드를 작성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고'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AI는 '사유'하지 못합니다. AI는 '나는 왜 존재하는가?'를 고뇌하지 않으며,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몸'을 통해 세계를 직접 경험하며 얻는 주체적 의식이나 '나'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AI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며, 사랑의 의미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AI에게 세계는 데이터의 집합일 뿐, 의미를 요청하는 실존적 장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AI가 '사고'를 완벽하게 해내는 지금, 인간이 AI와 '사고력'으로 경쟁하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지식의 양으로, 처리 속도로, 논리적 정합성으로 AI를 이기려는 시도는 증기기관차와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만큼이나 헛된 일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AI가 결코 할 수 없는 '사유'에 집중해야 합니다.


AI는 가장 효율적인 길을 알려주는 강력한 내비게이션입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입력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입니다. '사유'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목적지가 과연 가치 있는 곳인지 정하는 방향키입니다. AI는 '답'을 찾는 기계이지만, '사유'하는 인간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입니다. "왜 이 기술이 필요한가?", "이것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하는가?" AI가 내놓은 수많은 답 앞에서, 우리는 그 답을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고'가 공통의 논리라면 '사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유의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나의 경험, 나의 가치관, 나의 철학은 AI가 복제할 수 없습니다. '사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과정 그 자체가 AI 시대에 우리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듭니다. 결국 AI 시대의 새로운 문해력이란, AI의 강력한 '사고력'을 도구로 삼아, 인간 고유의 영역인 깊은 '사유'로 나아가는 능력입니다.



통합적 사유란 무엇인가: 연결하고 생성하는 힘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 깊은 질문 앞에 섭니다. 사유는 어떻게 생성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문해력의 여러 층위를 탐색해 왔습니다. 감각으로 세계를 읽고, 이미지로 의미를 구성하며, 패턴으로 관계를 포착하고, 변형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이 모든 사유의 층위들은 어떻게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는가?


문해력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읽고 그 세계 안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통합적 사유이며,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말한 '리좀적 사유'의 본질입니다. 통합적 사유는 단순히 지식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각, 이미지, 패턴, 변형의 모든 층위를 하나의 생태계로 엮어내며, 그 연결 속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힘입니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유는 언제나 연결이며, 연결은 생성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 통합적 사유의 본질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고립된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과 연결하는 과정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또 다른 단어로, 하나의 이미지는 기억 속 다른 이미지로, 하나의 감각은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가능성으로 끊임없이 연결됩니다. 이 연결의 그물망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생성'됩니다. 이것이 AI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사유의 본질이며, 바로 '통합적 사유의 힘'입니다.



나무와 리좀: 사유의 두 가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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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교육은 아이들에게 '나무형 사고'를 가르쳐왔습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해 줄기를 거쳐 가지로 뻗어나가는 위계적이고 선형적인 구조입니다. 수학은 수학대로, 국어는 국어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분리되어 있고, 각 과목은 다시 단원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실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계는 나무처럼 자라지 않습니다. 사유 역시 나무처럼 자라지 않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리좀(rhizome)'을 제시합니다. 리좀은 생강이나 감자처럼 땅속에서 수평으로 뻗어나가며, 어느 지점에서든 새로운 줄기를 틀 수 있는 식물의 뿌리줄기를 말합니다. 리좀에는 중심이 없습니다. 시작점도, 끝점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모든 지점이 다른 모든 지점과 연결될 수 있고, 하나의 줄기가 끊어져도 다른 곳에서 다시 자라날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바로 이것이 사유의 실제 작동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다섯 살 아이가 공룡 그림책을 읽다가 갑자기 "아빠, 공룡은 왜 없어졌어?"라고 묻고, 이어서 "그럼 우리도 언젠가 없어져?"라고 묻고, 다시 "할아버지도 없어진 거야?"라며 죽음에 대해 물어봅니다. 이 아이의 사유는 나무처럼 위계적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공룡 → 멸종 → 죽음 →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이 연결은 어떤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경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리좀적 사유입니다. '공룡'이라는 하나의 지점(node)이 중심이 아니라, '멸종'이라는 다른 지점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멸종'은 다시 '죽음'으로, '죽음'은 '할아버지'로, 모든 지점이 다른 지점과 예기치 않게 연결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 도약 안에 진정한 사유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통합적 사유의 힘입니다.


2장의 다른 절에서도 언급한 모든 사유의 핵심은 유동적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것끼리 연결하는 것이죠. 다섯 살 아이는 어느 날 떨어지는 낙엽을 보거나 말라서 시들어버린 꽃을 볼 때 공룡과 할아버지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정신은 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거대한 바다로 향합니다.



감각에서 생성으로: 문해력의 생태적 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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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앞선 네 개의 절에서 다룬 내용들이 어떻게 하나의 유기적 순환 속에서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해력은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며 서로를 강화하는 생태적 체계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층위를 통합하는 것이 바로 '통합적 사유의 힘'입니다.


첫째, 감각 문해력은 세계와의 최초 접촉입니다. 아이는 나뭇잎의 거친 표면을 만지고, 빗소리의 리듬을 듣고, 흙냄새를 맡습니다. 이 감각적 경험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만, 동시에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씨앗이 됩니다.


둘째, 이미지 문해력은 감각을 내면의 형상으로 변환합니다. 아이는 빗소리를 듣고 머릿속에 '회색 하늘' '웅덩이' '우산' 같은 이미지들을 떠올립니다. 이 이미지들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아이만의 고유한 내적 세계를 구성하는 재료입니다.


셋째, 패턴 문해력은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포착합니다. 비가 오면 웅덩이가 생기고, 웅덩이에는 하늘이 비친다는 연결을 발견합니다. 이 패턴의 발견은 세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넷째, 변형 문해력은 발견한 패턴을 새로운 맥락으로 옮깁니다. "비가 내 마음에도 내리고 있어"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날씨라는 자연 현상을 정서라는 내면 상태로 변형시킵니다. 이것이 은유의 탄생이며, 시적 언어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통합적 사유는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으면서 전혀 새로운 것을 생성해 냅니다. 아이는 빗소리, 웅덩이, 하늘의 반영, 슬픔의 감정, 어제 읽은 동화책의 한 구절, 할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모두 연결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이 이야기는 세계에 없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의 고유한 경험과 상상이 만들어낸 생성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통합적 사유의 힘이며, 세계를 읽는 것을 넘어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리좀적 독서: 책 한 권에서 세계를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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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리좀적 사유를 문해력 훈련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은 '독서'입니다. 전통적인 독서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고, 그 안에 담긴 정보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리좀적 독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리좀적 독서에서 한 권의 책은 고립된 텍스트가 아니라, 무수한 다른 세계들로 뻗어나가는 출발점입니다. 아이가 『어린 왕자』를 읽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전통적 독서에서는 "이 책의 주제가 뭐야?" "왕자는 왜 지구에 왔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도 물론 의미 있는 질문이지만, 리좀적 독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너도 외로웠던 적 있어? 그때 어떤 기분이었어?"라고 묻는 순간, 텍스트는 아이의 실제 경험과 연결됩니다. "사막은 어떤 냄새가 날까?"라고 묻는 순간, 시각적 텍스트는 후각적 상상으로 변환됩니다. "만약 여우가 왕자를 만나지 못했다면?"이라고 묻는 순간, 이야기는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분기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노래가 떠올라?"라고 묻는 순간, 문학은 음악과 만납니다. "서로를 길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고 묻는 순간,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길들였던 무수히 많은 대상들과 자신을 길들이는 타자들에 대해 사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리좀적 독서입니다. 책은 더 이상 닫힌 체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의 기억, 다른 책들, 영화, 음악, 일상의 경험, 꿈, 상상이 교차하는 교차점이 됩니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통해 세계 전체를 읽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독서는 정보 습득이 아니라 세계 창조가 되며, 이것이 통합적 사유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연결하는 질문: "이건 어떤 세계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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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적 문해력을 키우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연결하는 질문'입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말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이야기를 만들 때, 우리는 그것을 평가하거나 교정하려는 충동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이건 어떤 세계로 이어질까?"


일곱 살 아이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면 땅속으로 들어가서 보석이 돼"라고 말합니다. 이때 "아니야, 별은 떨어지면 사라져"라고 정정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옳지만, 사유를 막는 행위입니다.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럼 보석 안에 별빛이 남아 있을까?" "보석을 캐는 사람들은 그 별빛을 볼 수 있을까?" "만약 그 보석으로 반지를 만들면, 반지를 낀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들은 아이의 상상을 확장합니다. 별 → 보석 → 빛 → 광부 → 반지 → 변신으로 이어지는 이 연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적 사유입니다. 아이는 자연 현상(별의 낙하)을 물질(보석)로, 물질을 마법(변신)으로 변환하면서, 고대 인류가 세계를 이해했던 방식을 재연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의 대부분은 동화책을 읽으면서 "곰이 어떻게 말을 해?"라고 말하며 동화책을 유치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신화적 사유를 갖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곰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곰이 되는 신화는 우리에게도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가 이가 빠진 뒤 신이 나서 말합니다. "오늘 밤에 이빨을 베개 밑에 넣어둘 거야! 이빨 요정이 가져갈 거거든!" 이때 "얘야, 이빨 요정은 사실 너희 부모님이야"라고 말하는 어른은 절대 없을 겁니다.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아이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사유의 문을 닫는 행위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그 세계에 한 걸음 들어가, 아이의 눈을 보며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봅니다.


"와, 정말? 그런데 이빨 요정은 그 이빨을 다 모아서 어디에 쓰는 걸까? 전 세계 아이들한테 다 받으면 엄청 많을 텐데!" 이 질문 하나가 아이의 상상을 구체적인 '세계'로 확장합니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눈을 빛내며 말합니다.

"음... 요정 나라에 있는 '이빨 강'에 던져!"

이것은 교과서에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첫 번째 도약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연결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빨 강? 강물이 다 이빨이야? 아니면 물속에 이빨이 있는 거야?"

"물은 똑같은데, 강바닥에 이빨들이 자갈처럼 쫙 깔려있어! 그래서 밤에 달빛을 받으면 강 전체가 하얗게 빛나!" 아이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미지가 그려졌습니다.

이제 그 '세계의 법칙'을 묻습니다.

"그렇게 빛나면 정말 예쁘겠다. 그럼 요정들은 왜 힘들게 이빨을 모아서 강에 던지는 거야?"

"그 강물이 '기억을 지우는 물'이거든. 이빨에는 그 아이의 6살 때 기억이 담겨있는데, 그걸 강에 씻어 보내야 7살의 새로운 기억이 들어올 수 있대."

"그럼 이빨 요정은... 낡은 기억을 가져가는 일을 하는 거네?"

"응! 요정은 헌 기억이 담긴 이빨을 가져가고, 그 대신 7살이 쓸 수 있는 '새로운 꿈'이 담긴 동전을 베개 밑에 두고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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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를 보십시오. 이빨(현실 사건) → 이빨 요정(상상) → 이빨 강(세계관/장소) → 빛나는 강바닥(시각적 이미지) → 기억을 지우는 물(세계의 법칙) → 기억의 빈 공간(철학적 개념) → '꿈'이 담긴 동전(보상의 의미 재창조)으로 이어집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미술교육사업을 했을 때 만들기를 하면서 여섯 살 아이와 나눈 대화입니다. 너무나도 기특하고 신기해서 수업을 마친 후 다이어리에 적어둔 것이죠. 아이는 '빠진 이'라는 일상적 사건을 '요정'이라는 초월적 존재와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보상(동전)'이라는 단순한 결과에 머무르지 않고, '기억의 소멸과 생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칙이 작동하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실제로 부모님께 물어보니 이빨을 초콜릿 동전으로 바꿔치기해서 놓아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지혜롭고,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사유는 AI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AI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빨 요정'에 관한 수천 개의 기존 이야기(이빨 성, 마법 가루, 동전)를 '재조합'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아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억을 지우는 빛나는 강'과 '새로운 꿈이 담긴 동전'이라는 세상에 없던 고유한 서사(세계)를 '생성'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의 이 순간에 통합적 사유의 힘이, 즉 리좀적 문해력이 폭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심 없는 학습: 교과를 넘어선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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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적 문해력은 또한 교과의 경계를 해체합니다. 학교 교육은 지식을 과목별로 분할하여 가르치지만, 실제 세계에는 이런 경계가 없습니다. 통합적 사유는 이 인위적 경계를 넘어섭니다. 수학과 음악은 리듬을 통해, 과학과 철학은 존재의 질문을 통해, 역사와 문학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아이가 식물의 광합성을 배우면서 "식물은 빛을 먹는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럼 나도 햇빛을 먹으면 배가 안 고플까요?"라고 묻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이것을 우스운 질문으로 치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 안에는 생명, 에너지, 존재의 근본적 물음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인간은 광합성을 못 해"라고 단답 하는 대신,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빛을 먹고 있을까?"라고 되묻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은 아이를 비타민D와 햇빛의 관계로, 식물을 먹는 행위가 결국 저장된 햇빛을 섭취하는 것임을,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가 결국 별에서 왔다는 우주적 진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과학 → 영양학 → 생태학 → 천체물리학 → 철학으로 이어지는 이 여정은 어떤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통합적 사유의 힘이 만들어내는 지식의 생태계입니다.


결국 리좀적 문해력이 지향하는 것은 '사유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생태계에서는 모든 존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변화가 전체에 파급됩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 수 있듯이, 하나의 작은 사유가 아이의 전체 세계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는 도나 해러웨이가 말한 '반려종(companion species)'의 사유와도 연결됩니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개가 서로를 길들이며 공진화해왔듯이, 모든 사유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아이의 사유 역시 책, 사람, 자연, 예술과의 끊임없는 '되기(becoming)'의 과정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이 되어보는 것이고, 나무를 관찰한다는 것은 나무가 되어보는 것입니다. 이 '되기'의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의 경계를 확장하고, 세계는 더 풍부해집니다. 이것이 통합적 사유가 만들어내는 변화의 힘입니다.



AI 시대의 생성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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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러한 통합적 사유의 힘이 특히 AI 시대에 중요한 것일까요? AI는 기존의 패턴을 인식하고 재조합하는 데 탁월합니다. 수백만 권의 책을 읽고, 그 안에서 통계적 패턴을 찾아내어 그럴듯한 문장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에게는 감각이 없고, 몸이 없으며,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AI는 비를 느껴본 적이 없고, 외로움을 경험한 적이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삼겹살이 어떤 맛인지 기가 막히게 설명할 수 있지만 먹어 보지 않았습니다.


리좀적 문해력은 바로 이 감각적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사유입니다. 그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경험에 뿌리를 두고, 논리가 아니라 상상으로 도약하며, 계산이 아니라 감정으로 연결됩니다. 아이가 빗소리를 듣고 "하늘이 우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AI도 생성할 수 없는 진정한 '생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의 고유한 몸, 고유한 경험, 고유한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길러주어야 할 것은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결하고 변형하고 생성해 내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통합적 사유의 힘이며,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AI는 아이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아이만이 가진 감각, 기억, 상상, 감정의 고유한 배치 속에서만 진정으로 새로운 사유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훈련의 실제: 리좀적 대화

그렇다면 일상에서 어떻게 통합적 사유의 힘을 키울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답을 주는 대화'에서 '연결을 만드는 대화'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공룡은 왜 멸종했어요?"라고 물을 때, "운석이 떨어져서 그래"라고 답하는 대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너는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 "만약 공룡이 살아남았다면 지금 세상은 어떨까?" "사라진다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할까?"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것들은 또 뭐가 있을까?"


이 질문들은 하나의 사실(공룡 멸종)을 원인론, 가정법, 존재론, 경험론으로 확장합니다. 아이는 과학적 설명만 듣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과정에서 공룡은 더 이상 과거의 동물이 아니라, 변화, 상실, 가능성, 기억을 사유하는 매개가 됩니다. 이것이 통합적 사유를 키우는 대화입니다. 또 다른 훈련은 '경계 넘기'입니다. 아이가 수학 문제를 풀다가 "왜 삼각형은 세 개의 변이 있어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그게 정의니까"라고 답하지 마십시오. 대신 "네 개가 되면 어떻게 될까?" "만약 선이 휘어진다면?" "삼각형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말할까?"라고 물으십시오. 수학을 기하학으로, 기하학을 상상으로, 상상을 언어로 연결하는 이 과정이 바로 리좀적 사유이며, 통합적 사유의 힘을 키우는 훈련입니다.



문해력의 완성은 세계의 생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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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감각 문해력, 이미지 문해력, 패턴 문해력, 변형 문해력을 거쳐 마침내 통합적 사유의 힘으로 나아왔습니다. 이 여정은 선형적인 진보가 아니라 나선형의 상승이었습니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며, 모든 단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하고 강화합니다. 통합적 사유의 힘이란 결국 세계를 읽는 능력이 세계를 쓰는 능력으로, 이해가 창조로, 수용이 생성으로 전환되는 지점입니다. 아이가 책 한 권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세계를 또 다른 세계와 연결하며, 마침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때, 우리는 문해력의 완성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AI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능력입니다. 정보는 넘쳐나고 AI는 순식간에 답을 제시하는 세상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예상치 못한 연결을 발견하며, 없던 의미를 생성해 내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키워주어야 할 감각이며, 누적되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유의 생태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통합적 사유의 힘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의 사유가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 공간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대화의 방식이고, 질문의 태도이며, 연결의 허용입니다. 아이가 엉뚱한 말을 할 때, 그것을 교정하려 하지 말고 어디로 이어질지 함께 탐험해 보십시오. 아이가 만든 이야기에 "이건 어떤 세계로 이어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아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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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은 결국 세계와의 관계 맺기입니다.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연결하고 변형하고 생성하는 것입니다. 리좀처럼 자라는 사유, 중심 없이 확장되는 상상, 끝없이 생성되는 의미 — 이것이 우리 아이들을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통합적 사유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 힘은 이미 모든 아이 안에 씨앗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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