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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목소리의 탄생 - 서사를 만드는 아이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로 된다
— 폴 리쾨르(Paul Ricoeur) 철학자


입시철이 되면 전국의 고등학교에서 수많은 자기소개서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수백, 수천 명의 아이들이 마치 한 사람처럼 똑같은 문장을 씁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배려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경험은 제게 협동의 가치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고 싶습니다." 문장의 구조도, 어휘의 선택도, 심지어 사유의 방식까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합니다. 이 아이들은 분명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왔고, 다른 경험을 했으며, 다른 책을 읽었을 텐데, 왜 모두가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비단 입시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운영하는 북클럽에서 만난 한 중학교 2학년 학생은 『어린 왕자』를 읽고 이렇게 썼습니다. "이 책은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맞춤법도 정확하며, 문장 구조도 안정적입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입니다. 이 문장들은 누가 썼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보편적이고, 누구의 것도 아닐 만큼 추상적이며,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익숙함으로 가득합니다. 이 아이는 분명 책을 '읽었지만',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수행평가에 있어서 좋은 점수를 받는 쪽은 교과서적인 답변, 잘 갖추어진 글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과 서사가 들어간 이야기가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실제로 저의 제자들에게 수행평가를 할 때 최대한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쓰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도덕 시간에 '스마트폰 과의존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해 글을 쓰는 수행평가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사용 시간을 정한다', '유해 앱을 차단한다', '운동이나 취미 활동을 한다'처럼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일반적인 해결책을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제자는 "매일 밤 스마트폰을 끄고 30분간 대화를 나누기로 한 우리 집의 새로운 규칙"에 대해 썼습니다. 그리고 이 규칙을 정하게 된 계기(가족 간의 대화가 줄어든 일)와, 처음 며칠간은 폰이 없어 불안했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습니다. 제자는 교사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올바른' 해결책을 암기해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 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갈등과 그것을 해결하려 노력한 구체적인 '실천'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장의 교사들은 학생이 지식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고 해석하는 능력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육 현장이 '정답'을 암기하는 능력이 아니라, 지식을 자신의 삶과 연결하여 고유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이 여전히 『어린 왕자』 감상문처럼 모범적이지만 공허한 글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 개념에 따르면,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하고 말하는 이야기를 통해 형성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조직하고,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게 됩니다. 삶에서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 사건을 자신의 삶이라는 '플롯' 안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이야기'했느냐에 따라, 정체성과 미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실패 후 자신을 패배자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언어, 교과서의 문장, 입시 학원의 모범 답안으로만 자신을 표현하는 아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 아이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채, 타인이 부여한 언어의 그림자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AI 시대의 문해력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문해력의 첫 번째 결실은 단순히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조직하고,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하는 능력입니다. 타인이 부여한 언어가 아닌, 자신의 감각과 사유에서 출발한 고유한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 아이는 비로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왜냐하면 AI는 수백만 개의 텍스트를 학습하여 가장 보편적이고 통계적으로 타당한 문장을 생성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고유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말과 자기 말 사이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언어를 '타인의 말'과 '자기 말'로 구분했습니다. 타인의 말은 우리가 사회에서 습득한 언어, 권위 있는 담론, 이미 정해진 의미로 가득 찬 말입니다. 교과서의 문장, 참고서의 모범 답안, 어른들이 반복해서 들려주는 교훈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자기 말은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통해 재창조된 언어, 타인의 말을 자신의 맥락 속에서 변형하고 재해석하여 만들어낸 고유한 언어입니다. 바흐친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말하기'는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의도와 맥락 속에서 재맥락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교육 시스템에서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타인의 말'을 습득하고 재생산하는 데 보냅니다. 국어 시간에는 교과서가 제시한 '정답'을 찾아야 하고, 논술 학원에서는 '좋은 글'의 틀을 배우며, 자기소개서 컨설팅에서는 '입학사정관이 원하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법을 익힙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점점 더 능숙하게 타인의 기대를 읽고, 그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점점 더 불분명해집니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까지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성이 글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여기서 '자기만의 방'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과 기대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조직할 수 있는 심리적·언어적 공간을 의미합니다. 울프가 살던 시대의 여성들은 남성이 만든 언어, 남성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래서 여성 작가가 진정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면, 먼저 그 지배적인 언어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야 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타인의 언어로는 자신을 말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모리슨은 흑인 여성으로서 백인남성 우월주의의 언어 체계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배적인 언어는 특정한 경험만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그 밖의 경험들을 주변화하거나 침묵시킵니다. 모리슨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백인 중심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를 자신의 경험 속에서 변형하고 재창조하여 흑인 여성의 고유한 목소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만든 언어, 교육 시스템이 정해놓은 '좋은 문장'의 틀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도록 요구받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실제 경험은 그 틀에 온전히 담기지 않습니다. 게임을 하면서 느낀 몰입의 순간,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떠오른 엉뚱한 생각들—이런 것들은 교과서의 언어로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경험을 말하는 대신, 어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모범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진짜 목소리는 점점 더 깊숙이 침묵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서사를 만드는 연습

저의 북클럽에 외고와 자사고를 목표로 하는 중학생들이 모인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독서량도 많으며, 글쓰기 실력도 뛰어납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생각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첫 수업에서 "좋아하는 책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보세요"라고 하면, 아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답합니다. "엄마가 추천해 준 책이요", "학교 필독 도서 목록에 있던 책이요", "입시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은 책이요."


한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의 사례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처음 북클럽에 왔을 때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소설은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신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소외와 고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장은 완벽했습니다. 문법도, 논리도, 어휘 선택도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학생 자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고서나 해설서에서 본 내용을 재구성한 '타인의 말'이었습니다.


저는 이 학생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을 때, 네가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뭐였어? 그냥 편하게 말해봐." 한참을 망설이던 학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은요... 그레고르보다 가족들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레고르는 벌레가 됐는데도 가족 걱정을 하잖아요. 근데 가족들은... 처음엔 놀라다가 나중엔 그냥 귀찮은 존재로 취급하는 게... 진짜 무섭더라고요. 우리 집도 아빠가 항상 바쁘고 엄마도 학원 스케줄 관리하느라 정신없고... 가끔 내가 집에 없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순간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그 학생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참고서의 모범 답안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고유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살아있는 언어였습니다. 이 학생은 카프카의 소설을 '자본주의 사회 비판'이라는 추상적 틀로 이해하는 대신,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연결시켜 읽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카프카가 말하고자 했던 '소외'의 의미가 훨씬 더 생생하고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이후 6개월 동안 이 학생은 놀라운 변화를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여전히 '모범생의 언어'로 글을 쓰려고 애썼지만, 점차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 기반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84』를 읽고는 "빅 브라더가 무섭다기보다, 윈스턴이 자기가 뭘 느끼는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게 더 무서웠다. 나도 가끔 엄마 눈치 보면서 뭘 좋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고 썼습니다. 『이방인』을 읽고는 "뫼르소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장례식에서 슬픈 척하는 게 힘들 때가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학생의 변화에서 우리는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목소리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발견될 수 있을 뿐입니다. 교사나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 주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 공간 안에서 아이는 타인의 기대로부터 잠시 벗어나, 자신이 진짜로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 탐색할 수 있게 됩니다.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자기를 구성하기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가 형성되는 방식을 설명했습니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먼저 존재하고, 그 주체가 세계를 경험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주체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경험들 사이의 연결과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여러 지류들이 만나 흐르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듯이, '나'라는 존재도 다양한 경험들, 감각들, 사유들이 연결되고 조직되면서 형성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기 서사를 구축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다양한 경험들 사이에서 연결과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로 조직하는 창조적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어릴 때 개미를 관찰했던 경험, 레고로 건물을 만들었던 경험, 수학 문제를 풀면서 느낀 쾌감을 서로 연결하여 "나는 체계와 구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연결이 누군가 미리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가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발견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리쾨르가 말한 '해석학적 자아'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경험이라도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경험이 축적되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릴 때 부모님과 다투었던 기억은 그 당시에는 단순히 '화가 났던 사건'일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 그 상황을 되돌아보면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된 계기' 혹은 '독립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서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이고, 재구성되며, 확장됩니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하나의 완성된 정체성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발화 주체성(enunciative subjectivity)'의 형성입니다. 발화 주체성이란 단순히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로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목소리를 발견하는 여정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아이의 자기 목소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지원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부모가 관찰할 수 있는 변화의 징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징후는 질문의 변화입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이게 맞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처럼 타인의 판단과 승인을 구하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질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부분이 이상한데, 작가가 왜 이렇게 썼을까요?"처럼 자신의 생각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타인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확장하려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사유의 주체가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두 번째 징후는 글쓰기 방식의 변화입니다. 교과서나 참고서의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쓰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서투르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고, 논리적 비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에는 생기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것을 베낀 문장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사유에서 나온 살아있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이 순간 문법이나 논리의 완벽함을 지적하기보다는, 아이가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세 번째 징후는 판단 기준의 변화입니다. 자기 목소리를 찾기 전의 아이들은 "이 책 재미있어요?"라고 물으면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대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평가가 자신의 느낌보다 더 확실한 판단 기준인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자기 목소리를 형성해가는 아이는 "저는 처음에는 지루했는데, 중간부터 재미있어졌어요" 혹은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는데 저는 별로였어요"처럼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아이가 타인의 평가에 무조건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평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자기 목소리는 독단적 주장과 다릅니다. 진정한 자기 목소리는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형성됩니다. 바흐친이 강조한 '대화주의(Dialogism)'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목소리(언어)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독단적 주장"이라고 부르는 것, 즉 타인의 목소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언을 바흐친은 '독백주의(Monologism)'라고 부르며 비판합니다. 독백은 '죽은 언어'입니다. 이에 반해 '대화주의(Dialogism)'는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만나는 경계선에서 모든 의미와 자아가 탄생한다고 봅니다. '나'는 '너'에게 응답할 때 비로소 '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의식은 진공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너'라는 타자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언어는 언제나 타인의 언어와 만나고, 부딪히고, 섞이면서 형성됩니다. 자기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은 타인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북클럽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지킵니다. 첫째, "정답"을 미리 제시하지 않습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해서도 열 명의 아이가 열 가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고, 그 모두가 유효할 수 있습니다. 물론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은 자의적 해석은 대화를 통해 조정됩니다. 하지만 그 조정의 과정 역시 교사가 일방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읽으려면 이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처럼 질문을 통해 아이 스스로 성찰하도록 돕습니다.


둘째, 아이들의 언어를 존중합니다. 아이들은 종종 어른들이 쓰지 않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장면이 막 쫀득쫀득해요", "주인공이 엄청 찐득한 느낌이에요", "이 부분 읽을 때 뭔가 저벅저벅 걷는 느낌이었어요." 이런 표현들은 사전적 의미로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이들의 감각적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유치하다'며 고치려 하기보다는, "그 느낌을 좀 더 설명해볼래?"라고 물으면서 아이가 자신의 감각을 언어로 확장하도록 돕습니다.


셋째, 경험과 텍스트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어줍니다. 많은 아이들이 책 속의 세계와 자신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 자신의 경험과는 무관한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묻습니다. "이 장면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 있어?", "이 인물의 선택이 네 상황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 이런 질문들은 아이들이 책을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거울로 활용하도록 만듭니다.


자기 서사, 대체불가능성의 근원

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의 탄생은 단순히 글을 잘 쓰게 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세계 속에서 고유한 위치를 발견하고, 그 위치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AI는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평균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고유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리쾨르의 통찰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로 된다" 이 문장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조직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떤 서사로 엮어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그것을 '실패의 이야기'로 구성하는지 '배움의 이야기'로 구성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과 미래는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서사의 힘입니다.

북클럽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한 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정말 몰랐어요. 엄마가 좋다는 것, 선생님이 좋다는 것만 따라갔죠. 근데 여기서 책을 읽고 제 언어로 말하는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아직도 확실하진 않아요. 근데 적어도 이제는 제가 뭘 느끼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말할 수 있어요." 이 아이의 말에서 우리는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AI 시대에 우리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정보를 암기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정보는 AI가 훨씬 더 많이, 빠르게,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조직하며, 고유한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이 바로 자기 목소리의 탄생입니다.


자기 목소리는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발견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아이가 타인의 기대로부터 잠시 벗어나 자신의 감각에 주목할 수 있는 시간,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자신의 경험을 탐색할 수 있는 공간, 서투르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말해볼 수 있는 기회. 이것들이 모여 아이는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통해 아이는 비로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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