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관계가 실재이다.
관계 속에서만 나는 나-자신이 된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선생님, 저는 친구가 없어요."
이른 나이부터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한 중학생 제자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성적은 전교 5등 안에 들었고, 부모는 아이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아이의 내면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20년간 상담을 해오면서 저는 이러한 '성공한 고립'의 사례들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아이들은 1등이 되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는 법을 배웠지, 타인과 함께 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수능체제의 우리나라교육은 묘한 역설 속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협력'의 중요성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상대적 서열로 그들을 평가합니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라고 말하면서도, "네가 1등 해야 한다"고 압박합니다. 이 이중 메시지 속에서 아이들은 타인을 '함께 가야 할 동료'가 아닌 '이겨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학교라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세계를 읽는 근본적인 방식, 즉 문해력의 토대 자체를 왜곡시킵니다.
문해력을 단순히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차원을 놓치게 됩니다. 진정한 문해력은 타자의 세계를 읽는 능력, 관계의 결을 감지하는 능력, 나와 다른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능력입니다. 앞 장에서 우리는 감각적 사유, 이미지의 힘, 패턴 인식, 변형적 사고를 탐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 모든 능력이 관계 속에서 어떻게 꽃 피우는지, 그리고 왜 대체불가능한 존재는 고립이 아닌 관계 속에서만 탄생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길들임의 진정한 의미 - 관계를 읽는 문해력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맺는다는 거야." 이 한 문장은 현대 교육이 잃어버린 가장 본질적인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여우가 말하는 '길들임(apprivoiser)'은 지배나 소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과정, 상호적 변화와 책임의 과정입니다. 최근 이런 길들임의 철학이 그루밍 범죄나 가스라이팅 등 이질적으로 변질되어 타인의 심리를 지배하거나 조정하는 언어로 쓰여 참담한 마음입니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될 거야. 너는 나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나는 너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지."
여우의 이 말은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엠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평생을 탐구한 주제, 즉 '타자의 얼굴'과 공명합니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나'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해왔다고 비판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의 사유를 존재의 근거로 삼았고, 이는 타자를 나의 의식 안에서 파악되는 대상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진정한 윤리는 '타자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에서 시작됩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의 이해나 개념으로 포섭될 수 없는 무한성을 드러냅니다. 그 얼굴은 나에게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며, 동시에 나의 존재 자체를 질문에 부칩니다. "당신은 타자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비로소 윤리적 주체가 됩니다. 타자는 나를 호명하고, 나는 그 호명에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나'가 됩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이를 '나-너(I-Thou)' 관계와 '나-그것(I-It)' 관계의 구분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나-그것' 관계에서 타자는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 분석과 활용의 대상입니다. 현대 경쟁 교육이 만들어내는 관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친구는 '나의 성적을 위협하는 경쟁자'이거나 '내가 혼자서 밥을 먹지 않도록 하는 외로움을 가려주는 수단'이 됩니다. 반면 '나-너' 관계에서 타자는 그 자체로 목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존재가 됩니다.
저의 북클럽에서 이러한 철학적 통찰이 실제로 아이들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목격합니다. 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해리포터』를 읽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처음에 해리가 주인공이라 해리만 좋아했어요. 근데 계속 읽다 보니까 론이 없었으면 해리는 아무것도 못 했을 것 같아요. 론은 해리를 믿어주잖아요. 해리가 다른 사람들한테 오해받을 때도요." 이 아이는 단순히 책의 줄거리를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는 관계의 본질을 읽어냈습니다. 주인공의 위대함이란 그 개인의 고립된 능력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관계들의 그물망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친구 관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제 친구 지훈이를 그냥 '공부 잘하는 애'로만 봤는데, 지훈이는 항상 제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줬어요. 저는 그걸 몰랐어요."
이것이 바로 관계 문해력입니다. 텍스트 속 관계를 읽는 능력이 자신의 삶 속 관계를 새롭게 읽는 능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입니다. 아이는 친구를 '경쟁 상대'나 '비교 대상'이라는 '나-그것'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나-너' 관계로 나아갔습니다.
토토로의 숲 - 존재론적 공존의 감각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는 관계 문해력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줍니다. 사츠키와 메이 자매는 시골로 이사 와서 신비로운 숲의 정령 토토로를 만납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장면은 메이가 처음 토토로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메이는 작은 토토로들을 따라가다가 거대한 토토로 옆에서 잠이 듭니다. 그 장면에는 어떤 긴장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오직 평화로운 공존만이 있습니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이를 '함께-되기(becoming-with)'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를 구성하며 함께 생성되는 과정 말입니다. 메이에게 토토로는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토토로는 함께 숨 쉬고, 함께 잠들고, 함께 존재하는 동료입니다. 이 관계에는 언어적 소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소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론적 공명, 감각적 공존입니다.
현대 아이들은 점점 더 이러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자와의 관계를 '정보 교환'으로 이해합니다. "친구가 뭐라고 말했어?", "선생님이 뭐라고 설명했어?"라는 질문은 관계를 언어적 메시지의 전달로 환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관계는 말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 침묵의 리듬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시간의 질감 속에서 형성됩니다.
저는 공존하는 아이들을 위해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너희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친구는 누구니? 그리고 그 친구와 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니?"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친구 서연이요. 서연이랑 있으면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다른 친구들이랑 있으면 계속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서연이랑은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아요." 이 아이는 관계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관계는 '말'이 아니라 '함께 있음' 그 자체에서 형성됩니다. 레비나스가 말했듯, 타자의 얼굴은 개념이 아니라 현전(presence)입니다. 우리는 타자를 이해함으로써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 있음으로써 관계를 맺습니다. 토토로의 숲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존재론적 공존의 감각입니다.
차이를 읽는 능력 - 공감의 인식론
그러나 함께 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관계 문해력은 타자의 '다름'을 읽어내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공감을 넘어, 인식론적 차원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저의 제자가 친구와의 갈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 제 친구 수민이가 요즘 저를 피해요. 수민이가 수학 시험을 못 봐서 기분이 안 좋길래 제가 '괜찮아, 넌 원래 잘하잖아. 다음엔 분명 잘할 거야'라고 위로해줬거든요. 근데 수민이가 갑자기 화를 내면서 '너는 모르면서 그러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냥 친구를 위로하려고 한 건데..."
저는 제자와 함께 수민이의 세계를 상상해보았습니다. "수민이가 너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아이는 처음에는 답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타자의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 이것은 쉽지 않은 인지적 전환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대화를 이어가면서 그 아이는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민이는... 자기가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을 못 봐서 속상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다음엔 잘할 거야'라고 하니까, 제가 수민이의 노력을 몰라준다고 느꼈을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쉽게 '괜찮아'라고 해서, 수민이의 마음이 괜찮지 않은데 그걸 무시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이 순간 그 아이는 '공감의 인식론'으로 진입했습니다. 자신의 의도와 타자의 해석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 같은 말이라도 다른 맥락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아이는 깨달았습니다. "아, 수민이는 위로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을 수도 있겠어요. '속상하구나'라고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이는 단순히 '수민이의 기분을 이해하기'를 넘어, 수민이가 세계를 읽는 방식 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과 공감이 필요한 순간은 다릅니다. 해결책이 필요한 순간과 함께 아파해줄 사람이 필요한 순간은 다릅니다. 그리고 이 차이를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관계 문해력입니다.
레비나스는 이를 '타자의 무한성'이라고 불렀습니다. 타자는 결코 나의 개념 틀 안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습니다. 항상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잉여, 나의 해석을 초과하는 의미가 존재합니다. 이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윤리의 시작입니다. 나는 타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세계에 다가가려는 무한한 책임을 짊어집니다.
저는 문학을 통해 이러한 '차이 읽기'를 훈련시킵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때, 우리는 "누가 옳은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왜 서로 다르게 읽었는가?"를 묻습니다. 한 아이는 『마틸다』의 주인공을 '똑똑해서 외로운 아이'로 읽었고, 다른 아이는 '용감하게 맞서는 아이'로 읽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해석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삶의 맥락을 탐색합니다. 첫 번째 아이는 자신도 또래보다 공부를 잘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느꼈고, 두 번째 아이는 최근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배웁니다. 해석의 차이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며, 그 다름 속에는 각자의 고유한 세계가 담겨 있다는 것을. 그리고 타자의 해석을 들으면서 자신의 세계도 확장됩니다. "아, 그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이 감탄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존재론적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은 아동·청소년기의 견고한 자기중심적 경향성에 틈이 생기게 합니다.
AI 시대의 관계 문해력 - 연결과 단절의 역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가장 '단절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AI와 디지털 기술은 언제 어디서나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통은 진정한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페이스북 친구 500명, 인스타그램 팔로워 1,000명을 가진 아이가 "저는 진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왜 이런 역설이 발생할까요? 디지털 소통은 본질적으로 '편집된' 소통입니다. 우리는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수정하고, 사진을 올리기 전에 필터를 씁니다. 이 과정에서 관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불완전함', '예측불가능함', '즉흥성'이 사라집니다. 부버가 말한 '나-너' 관계는 본질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만남입니다. 타자는 나의 예상을 벗어나고, 나의 계획을 뒤흔들며,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불편함 속에서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납니다.
AI 시대에 대체불가능한 아이로 키운다는 것은, 이러한 '불편한 관계'를 견디고 심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AI는 완벽한 답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AI는 나의 편견에 도전하지 않고, 나의 세계관을 흔들지 않습니다. 반면 진정한 타자, 즉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은 나를 끊임없이 질문에 부칩니다.
AI도구를 잘 다루는 고등학생 제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ChatGPT가 너무 편해요. 제가 물어보면 바로 답해주고, 제 말을 절대 부정하지 않아요. 근데 친구들은 자꾸 제 말에 '아니야, 그게 아니라'라고 해요. 솔직히 친구들이 귀찮을 때가 있어요." 이 아이는 정확히 문제의 핵심을 짚었습니다. AI는 '관계'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AI는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진정한 관계는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항상 타자의 저항, 타자의 이의 제기를 통해 일어납니다.
관계 문해력의 실천 -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기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게 아이의 관계 문해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을 제안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방법들이 단순한 '기술'이나 '스킬'이 아니라, 존재론적 태도의 전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숨은 의미 읽기' 훈련입니다. 일상의 대화에서 아이가 표면적 의미를 넘어 맥락을 읽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친구가 '괜찮아'라고 했어요"라고 말할 때, "친구가 정말 괜찮다고 생각해?"라고 되묻는 것입니다. 목소리의 톤, 표정의 변화, 말하기를 주저하는 순간들을 읽어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비언어적 신호 파악'이 아닙니다. 이것은 타자의 세계가 언어로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 침묵과 망설임 속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둘째, '입장 바꿔 상상하기'입니다. 아이가 갈등 상황을 이야기할 때, 즉각적으로 아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를 함께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 입장에서는 틀리지 않았어"라는 상대주의적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세계는 나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복수성의 인정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했듯, 복수성(plurality)은 인간 조건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며, 그 다름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셋째, '비교에서 차이로'의 언어 전환입니다. "너는 친구보다 더 잘했어"가 아니라 "너는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었구나, 친구는 저런 방식으로 풀었네"로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인식의 근본적 전환입니다. 비교는 위계를 만들지만, 차이는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아이가 친구의 '다름'을 '틀림'으로 읽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성으로 읽을 수 있을 때, 그 아이는 진정한 관계 문해력을 갖춘 것입니다.
넷째, '함께 탐구하는 동반자'로서의 부모 역할입니다. 북클럽다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선생님도 정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함께 질문합니다. "이 캐릭터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만약 네가 이 상황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아이들에게 사유의 공간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부모나 교사도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탐구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역설한 '무지한 스승(the ignorant schoolmaster)'의 핵심입니다. 랑시에르는 모든 인간의 지성이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전통적인 '설명하는 스승'이 오히려 학생의 '무지'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지적 위계를 만들어낸다고 비판합니다. 스승의 설명은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할 기회를 가로막는 '장막'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 랑시에르는 스승이 "나는 네가 배우려는 것을 모른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승은 지식의 내용을 전달하지 않고, 학생이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려 노력하는지 '관찰'하고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타인의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전적으로 활용하여 스스로 지식을 습득하는 '지적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교육 방법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관계의 문제입니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학생을 '가르쳐야 할 무지한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지성을 가진 탐구자'로 인정합니다. 이는 부버가 말한 '나-너' 관계의 교육적 실천입니다.
이는 레비나스의 가르침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진정한 가르침(teaching)은 나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나 자신도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학생으로부터 배웁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면서 동시에 아이에게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합니다. 부모가 '나도 잘 모르겠다. 함께 찾아볼까?'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지성을 전적으로 사용해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설 용기를 얻습니다. 동시에 그 순간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지적 위계가 아닌 탐구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이 상호적 변화와 지적 평등의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며,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성장입니다.
대체불가능함의 역설 - 관계 속에서 빛나는 고유성
이제 우리는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책의 부제는 "대체불가능한 독보적인 우리아이 만들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대체불가능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립된 개인의 탁월함일까요, 아니면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고유성일까요?
현대 사회는 대체불가능함을 '독립성'과 '자기충족성'으로 이해합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개인이 대체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오해입니다. 진정한 대체불가능함은 관계 속에서만 발현됩니다.
『어린왕자』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넌 네 장미에게 책임이 있어." 어린왕자의 장미는 우주에 무수히 많은 장미들 중 하나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왕자가 그 장미를 돌보고, 물을 주고, 바람막이를 세워주고,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그 장미는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장미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해러웨이가 말하는 '반응-능력(response-ability)'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응답하는 과정에서 형성됩니다. 아이의 공감 능력은 진공 상태에서 발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고, 타자의 기쁨에 공명하고,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수많은 관계적 경험들 속에서 형성됩니다.
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북클럽을 마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처음에 제가 특별해지려면 남들과 다른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안 읽는 책을 읽고, 남들이 안 하는 활동을 하고. 근데 북클럽을 하면서 알았어요. 제가 특별한 건 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에요. 제 친구는 저한테만 자기 고민을 얘기해요. 제 동생은 저한테만 화를 내요. 이게 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 아이는 깊은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대체불가능함은 관계적 개념입니다. 나는 타자들과 맺은 고유한 관계들의 교차점에서 대체불가능해집니다. 해리포터가 대체불가능한 이유는 그의 마법 능력 때문이 아니라, 론과 헤르미온느와의 우정, 덤블도어와의 멘토링 관계, 심지어 볼드모트와의 적대 관계 때문입니다. 이 모든 관계들이 해리를 해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AI 시대에 이 통찰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AI는 정보를 처리하고, 패턴을 인식하고, 심지어 창의적인 결과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의미에서의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습니다. AI에게는 책임이 없고, 응답-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관계 문해력이야말로 인간을 AI와 구분하는 가장 근본적인 능력입니다.
관계 속에서 꽃피는 세계관
마지막으로, 관계 문해력은 단순히 대인관계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를 읽는 근본적인 방식의 전환입니다. 앞 장에서 우리는 감각, 이미지, 패턴, 변형, 리좀적 사고 등 다양한 문해력의 차원들을 탐구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관계적 맥락 속에서 통합될 때, 진정한 세계관이 형성됩니다.
아이가 자연을 볼 때, 그것을 '자원'으로 보는가 '동료'로 보는가는 관계 문해력의 문제입니다. 아이가 역사를 배울 때, 그것을 '승자의 기록'으로만 읽는가 '침묵당한 목소리들'까지 읽어내는가는 관계 문해력의 문제입니다. 아이가 과학을 공부할 때,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만 이해하는가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는가는 관계 문해력의 문제입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 통합적 세계관의 형성입니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서 등장인물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타자를 이해하며, 세계를 새롭게 읽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서로 다른 아이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해석을 듣고, 갈등하고, 조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공동으로 구성하는 대화적 공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존재. 공존하는 아이. 이것이 AI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인간상입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타자의 세계를 존중하며, 자신의 고유성을 발현하면서도 그 고유성이 관계 속에서 형성됨을 압니다. 이러한 아이야말로 진정으로 대체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빛나는 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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