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행착오를 환대하는 교육, 실패의 인식론

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by 문이재
대화는 답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다.
—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한 아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종이 위에는 몇 줄의 문장이 쓰여 있다가 지워지고, 다시 쓰여 있다가 또 지워집니다. 아이는 연필을 쥔 손을 멈추고 한숨을 쉽니다. '힘들어서 글 못 쓰겠어요.' 이 말 속에는 단순히 글쓰기 기술의 부족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한 번에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무거운 압박이, '틀리면 안 된다'는 내면화된 공포가, '실패는 곧 무능함의 증거'라는 뿌리 깊은 신념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몸짓과 표정은, 우리가 선택하는 언어의 뉘앙스는, 우리가 조직하는 교육 구조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100점 만점의 시험지, 표준화된 정답, 효율성을 추구하는 교육과정—이 모든 것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체계입니다. 실패는 교정되어야 할 결핍이며, 제거되어야 할 오류이며, 숨겨야 할 치욕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배움은 언제나 실패의 경험 한가운데서 피어납니다. 존 듀이(John Dewey)가 "우리는 행함으로써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한 것을 성찰함으로써 배운다"고 말했을 때, 그는 경험과 실패와 성찰의 삼각 구도 속에서만 진정한 학습이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패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를 마주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성찰의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는 세계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합니다.


칼 포퍼(Karl Popper)는 과학의 발전이 확증이 아니라 반증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과학적 이론은 끊임없이 실패의 가능성에 노출되어야 하며, 그 실패를 통해서만 더 정교한 이론으로 진화합니다. 실패는 단순히 '틀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의 통로'입니다. 이것은 과학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해력 발달, 사유 능력의 성장, 창조적 표현의 확장—이 모든 것은 시행착오라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짧지만 강렬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여기서 '더 잘 실패하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실패에도 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반복되는 실패와 성찰을 동반하는 실패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은 실패하지 않는 환경이 아니라, '더 잘 실패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AI 시대에 이러한 실패의 인식론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인식하며 정확한 답을 도출하는 데 탁월합니다. 그러나 AI는 '의미 있는 실패'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AI의 오류는 단순히 알고리즘의 수정이나 데이터의 보완으로 해결되는 기술적 문제입니다. 반면 인간의 실패는 존재론적 경험입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실존적 차원의 실패 경험이야말로 대체불가능한 인간 고유의 배움의 방식입니다.



실패를 자원으로 전환하는 사유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9일 오후 09_00_01.png

토마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1만 번의 실패를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실패의 횟수가 아니라 에디슨의 인식론적 전환입니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작동하지 않는 1만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 말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의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실패를 결핍에서 자원으로, 오류에서 지식으로 재정의하는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이 담겨 있습니다.


J. K. 롤링이 《해리 포터》 원고를 12개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는 사실,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수백 번의 버전을 거쳐 완성된다는 사실—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창조적 작업은 본질적으로 반복적인 실패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도가 완벽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입니다. 오히려 첫 번째 시도는 문제를 발견하기 위한 탐색이며, 두 번째 시도는 그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실험이며, 세 번째 시도부터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북클럽에서 5년간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가장 흥미롭고 깊이 있는 토론은 "틀린 답"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을 완전히 잘못 해석했습니다. 교사는 즉각 정정하는 대신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해줄래?' 아이가 자신의 해석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 논리를 따라가던 우리는 텍스트의 새로운 층위를 발견했습니다. 아이의 "오독(misreading)"은 사실 텍스트 속에 숨겨진 다른 가능성을 읽어낸 "창조적 읽기"였던 것입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오류를 단순히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가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는 생산적 힘으로 이해했습니다. 표준화된 해석, 정형화된 이해, 관습적 독해는 안전하지만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잘못된" 해석, "엉뚱한" 질문, "이상한" 연결은 위험하지만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가능하게 합니다. 문해력의 본질이 언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이라면, 그것은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잘못된 길"을 경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캐롤 드웩(Carol Dweck)의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 이론은 이러한 통찰을 교육심리학적으로 뒷받침합니다. 고정 마인드셋을 가진 아이들은 실패를 자신의 고정된 능력의 한계로 해석합니다. '나는 글을 못 써.' '나는 수학을 못 해.' 이러한 해석은 더 이상의 시도를 막습니다. 반면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아이들은 실패를 아직 개발되지 않은 능력,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방법, 아직 시도되지 않은 접근의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이 방법은 안 되는구나.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자.'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성장 마인드셋이 단순히 "노력하면 된다"는 의지주의로 축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노력 그 자체가 아니라 성찰적 노력입니다. 도널드 쇤(Donald Schön)이 말한 "실천 중 성찰(reflection-in-action)"은 행동하면서 동시에 그 행동을 관찰하고, 즉각적으로 조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메타인지적 차원의 학습이며, 단순히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배우는지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실패의 언어, 실패의 공간

sunjongmoon_A_child_sitting_at_a_desk_frustrated_with_erased__ec1a195a-f82c-479a-827f-ce61008344c8_2.png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이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실패로부터 배우는 존재로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전환에서 시작됩니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힘이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실패를 어떻게 명명하고, 어떻게 의미화하는가는 아이들이 실패를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근본적으로 결정합니다.


'틀렸어'라는 말은 종결입니다. 그것은 아이의 시도를 무효화하고 대화를 차단합니다. 반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까?'는 초대입니다. 그것은 아이의 시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가능성들을 탐색하도록 이끕니다. '왜 이렇게 못해?'는 비난이며 아이의 존재 자체를 평가절하합니다. 반면 '어려웠구나, 어떤 부분이 어려웠어?'는 공감이며 동시에 문제를 구체화하는 출발점입니다. '이건 네 수준이 아니야'는 아이의 능력을 고정된 것으로 규정합니다. 반면 '도전적이네! 어디서부터 시작해볼까?'는 도전을 성장의 기회로 재정의하고 구체적인 접근 방법을 모색하도록 합니다. '다시 해'는 무의미한 반복을 요구합니다. 반면 '이번에 뭘 다르게 해볼 수 있을까?'는 성찰적 재시도를 촉구합니다.


이러한 언어의 전환은 단순히 표현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인식론적 재구성입니다. 실패를 결핍의 증거에서 학습의 자원으로, 피해야 할 것에서 탐구해야 할 것으로, 개인의 무능함에서 공동의 탐색 과제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어적 전환이 반복되고 내면화될 때, 아이들은 점차 자신의 실패를 다르게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패가 안전하게 일어날 수 있는 구조적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은 실패와 배움이 일어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여기서는 틀려도 괜찮아'라는 것이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되는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북클럽에서 우리가 만든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이상한 생각 환영"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무엇인가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흥미로운데, 더 설명해줄래?'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아이에게 자신의 생각이 가치 있으며, 탐구할 만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워하던 아이들이 점차 대담한 해석을, 도발적인 질문을, 실험적인 표현을 시도하기 시작합니다. 실패가 처벌이나 비난이 아니라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집니다.


한 아이가 글쓰기에서 반복적으로 막혔습니다. 문제는 기술적 능력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완벽주의적 압박이 아이를 마비시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이에게 "나쁜 글을 쓸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일단 네가 생각하는 대로 써봐. 엉망이어도 괜찮아. 나중에 같이 다듬으면 돼.' 이 허가는 역설적으로 아이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자,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쁜 글" 속에서 우리는 아이의 고유한 목소리를, 독특한 시선을, 잠재된 표현력을 발견했습니다.


또 다른 아이는 수학 문제를 교과서와 다른 방법으로 풀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습니다. 교사는 '그건 틀린 방법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정답은 아니지만, 네 접근법이 흥미롭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설명해줄래?'라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교사와 아이는 함께 그 방법이 왜 작동하지 않는지를 분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단순히 정답을 아는 것을 넘어서, 수학적 개념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류가 개념 이해를 촉진한 것입니다.



실패를 학습으로 전환하는 구조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9일 오후 09_16_20.png

실패로부터의 배움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실패를 의미 있는 학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성찰의 구조가 필요합니다. 듀이가 강조한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는 바로 이 성찰의 구조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실패를 경험한 후, 그것을 단순히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다음 행동으로 연결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실패의 가시화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많은 경우 아이들은 막연하게 '안 된다', '어렵다', '못하겠다'고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실패의 지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보아야 합니다. '이 문장에서 막혔어?' '이 개념이 이해가 안 가?' '여기서 방법을 찾지 못했어?' 실패를 추상적인 "무능함"에서 구체적인 "과제"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실패의 분석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원인을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인 탐구가 비난으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네가 게을러서', '네가 집중 안 해서'가 아니라, '이 부분의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이 단계를 건너뛰어서', '이 방법이 이 상황에 적합하지 않아서' 등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분석은 아이가 실패를 개인적 결함이 아니라 해결 가능한 문제로 인식하도록 돕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실패의 재해석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알려주는가?" 모든 실패는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이 작동하지 않는지, 어떤 가정이 잘못되었는지, 어떤 접근이 필요한지—실패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드러냅니다. 포퍼가 말한 것처럼, 반증은 발견입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재해석을 통해 실패는 단순히 "잘못된 것"에서 "새로운 정보"로 전환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실패의 활용입니다. "다음 시도에 어떻게 적용할까?" 성찰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앞서의 분석과 재해석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음 시도를 다르게 계획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을 시도할 수도 있고, 더 작은 단계로 나눌 수도 있고, 추가적인 자원이나 도움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다시 한번"이 아니라 "다르게 한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 단계의 구조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 이것이 메타인지 능력을 키우는 핵심입니다. 아이들은 점차 스스로 이 과정을 내면화하여,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성찰하고 조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배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실제로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 습관을 조사한 연구들은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실패 일지" 혹은 "연구 노트"를 체계적으로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실험만이 아니라, 실패한 실험을 기록하고, 왜 실패했는지 분석하고, 거기서 무엇을 배웠는지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실패를 학습 자원으로 전환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습관을 길러줄 수 있습니다. "오늘 무엇을 시도했고, 무엇이 안 되었고, 왜 안 되었고, 거기서 무엇을 배웠는가?"를 기록하는 것—이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인식론적 훈련입니다.



부모와 교사, 실패의 모델링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9일 오후 09_19_31.png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실패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의 실수는 숨기고, 완벽한 부모나 교사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이들은 우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부터 배웁니다.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고, 실수를 감추고,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이들 역시 그렇게 배울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신의 실패를 솔직하게 공유하고, 그로부터 배운 것을 이야기하고, '나도 잘 모르겠어, 함께 알아가보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이들은 실패가 인간 경험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며, 배움의 기회라는 것을 체득하게 됩니다.


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이 앞에서 항상 완벽한 엄마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요리도 잘하고, 공부도 잘 가르치고, 모든 질문에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그게 아이를 더 압박했더라고요. 완벽한 엄마가 있으니까, 아이도 완벽해야 한다고 느낀 거죠.' 이 어머니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요리를 실패했을 때 '어머, 이거 망했네. 다음엔 뭘 다르게 해야 할까?'라고 말하고, 아이의 질문에 답을 모를 때 '엄마도 잘 모르겠는데, 우리 같이 찾아볼까?'라고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아이는 더 편안해졌고, 자신의 실수나 무지를 숨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실에서 '선생님도 이 문제 정답을 바로 못 찾았어. 여러 번 시도해봤지'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학생의 질문에 '좋은 질문인데, 선생님도 확실하지 않네. 같이 알아보자'라고 말하는 것—이것은 교사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움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교사가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적 존재가 아니라, 함께 배워가는 동료 학습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정성입니다. 아이들은 위선을 민감하게 감지합니다.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성공만을 기대하고 실패를 실망스러워한다면, 아이들은 그 이중 메시지를 읽어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실패를 학습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실패를 성찰하고, 거기서 배우는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아이들도 실패를 환대할 수 있게 됩니다.



AI 시대, 실패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9일 오후 09_11_23.png

인공지능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AI는 인간적 의미에서 실패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AI의 오류는 알고리즘의 버그이거나 데이터의 불충분함일 뿐, 실존적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AI는 실패로부터 "좌절"하지 않으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며, 그럼에도 "재시도"하려는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의 실패는 단순히 기능적 오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아상의 위협이며, 존재론적 불안이며, 동시에 성장의 기회입니다. 실패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는 것이며, 세계가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도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전체 과정이 인간 고유의 실존적 경험입니다.


AI는 주어진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훈련됩니다. 반면 인간은 문제를 다르게 정의하고, 예상치 못한 해결책을 시도하고, 실패로부터 전혀 새로운 질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페니실린의 발견, 포스트잇의 발명, X선의 발견—과학과 기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들 상당수가 실패나 우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견이 된 것은, 실패를 단순히 실패로 치부하지 않고 탐구한 인간의 능력 때문입니다.


문해력의 맥락에서 이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AI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패턴을 인식하고, 표준적 해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는 "잘못" 읽을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AI의 오독은 단순한 오류일 뿐, 창조적 오독이 될 수 없습니다. 반면 인간의 오독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이 말한 "강한 오독(strong misreading)"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위대한 시인들은 선배 시인들을 "잘못" 읽음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활용하면서도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인간적으로 실패하고 배우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이 아니라, 실패를 의미 있게 경험하는 능력.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는 용기. 예상치 못한 결과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창조성. 이것이 AI 시대에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능력입니다.



실패를 환대하는 교육으로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0일 오전 11_05_55.png

시행착오를 환대한다는 것은 단순히 실패를 용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패를 교육의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실패를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자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교육 패러다임 전체가 전환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평가 시스템을 재고해야 합니다. 100점 만점 체제, 표준화된 정답, 일회적 평가—이 모든 것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구조입니다. 대신 우리는 과정 중심 평가, 성장 중심 피드백, 반복적 수정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번 시도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지난번보다 무엇이 나아졌는가?" "다음에 무엇을 시도해볼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평가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학습 과제의 성격을 바꿔야 합니다. 정답이 명확한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답이 가능한 문제, 답이 없는 문제, 학생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과제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개방형 과제에서 실패는 불가피하며, 동시에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탐구 과정이 됩니다.


셋째, 우리는 협력적 학습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개인의 실패가 개인의 치욕이 아니라 공동체의 학습 자원이 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누가 이번 주에 가장 흥미로운 실수를 했나요?"라는 질문이 자연스러운 교실, 실패 사례를 공유하고 함께 분석하는 것이 일상인 교실을 만들어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진정한 배움, 깊이 있는 이해, 창조적 산출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빠르게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이해를 구성하는 시간. 효율성보다 깊이를, 속도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북클럽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천천히, 충분히"입니다. 책을 빨리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을 깊이 있게, 자신의 방식으로,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읽는 것. 글을 정해진 형식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쓰는 것. 이러한 접근은 외견상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5년간의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이렇게 충분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경험한 아이들이 결국 더 깊이 있는 문해력을, 더 창조적인 표현력을, 더 독립적인 학습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잘 실패하기 위하여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0일 오전 11_05_06.png

베케트의 말로 돌아가 봅시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여기서 "더 잘 실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실패로부터 더 많이 배운다는 것입니다. 실패를 더 깊이 성찰한다는 것입니다. 실패를 더 창조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AI 시대에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이 아니라 "더 잘 실패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능력,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용기, 실패를 새로운 발견으로 전환하는 창조성—이것이 인간 고유의, AI가 대체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듀이가 말했듯이, "교육은 삶의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삶은 끊임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벽해질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그 불확실성, 그 실패 가능성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의 창조성을 촉발하는 것입니다.


시행착오를 환대하는 교육은 아이들을 실패로부터 보호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이들이 실패를 의미 있게 경험하도록, 실패로부터 배우도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돕는 교육입니다. 그러한 교육을 통해 성장한 아이들은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주어진 문제를 푸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정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체불가능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실패는 교정되어야 할 결핍이 아니라 배움의 자원입니다. AI는 효율적으로 정답을 찾지만, 인간만이 실패를 의미 있게 경험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환대하는 교육은 실패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로부터 배우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실패에 대한 언어를 전환하고, 심리적으로 안전한 공간을 조성하며, 체계적 성찰의 습관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어른들이 먼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그로부터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더 잘 실패하는 능력"이야말로 AI 시대에 우리 아이들을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핵심 역량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