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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May 24. 2024

경단녀, 프리랜서로 첫 출장의 기억


업무상 지방 도시에 와 있다. 프랜차이즈 숙소 7평 남짓 소담한 모텔방에 누워 쏟아지는 느낌과 생각들을 기록해본다.


국내 제법 큰 도시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는 익숙한 문자들이 통용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 마치 해외 어느 소도시에 온 기분이다. 방음이 시원치않은 숙소라 내 방 앞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분주하게 청소하는 직원들의 정체불명 외국어 때문인지 모르겠다. 차오르는 삭막함,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함, 그리고 집에 가고 싶은 진한 향수, 눈에 선한 나의 아직 영글지 못한 세 아이들... 이 모든게 나를 10년전 떠났던 해외출장의 차가운 기억을 소환한다. 모처럼 만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때의 추억을 잡아보려 노트북을 열어제꼈다.


10년전쯤 나는 내 커리어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큰 기업의 일원이 되었다. 갈길이 구만리였던 비즈니스에 웃기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나에게 모두의 기대가 펼쳐졌고, 기대에 응하고 말겠다는 당돌한 욕심이 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시기였다.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꽁꽁 숨겨둔 나의 한계를 가장 많이 맞닥뜨린 시기이기도 했다. 한번은 미국 지사에 출장을 갔다. 뉴욕 옆에 있는 소도시에 위치한 회사는 한적하고 부내나는 외곽의 커다란 용모를 자랑했다. 나와 같이 미국 땅을 밟은 대부분의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가 모셔야 했던 거래처, 판매처의 바이어들과 임원급 직원들은 맛집이며 명소를 다닐 때쯤 나는 그 건물에 갇혀 며칠째 제품 포트폴리오와 제품 이슈를 듣고 있었다.


그 전에도 다국적기업에 근무하던 나이지만 미국 본토의 진한 외국 발음과 이미 너는 잘 알잖아 식의 무자비한 속도와 생략적 화법, 쉽지 않은 컨텐츠의 내용과 분량이 나를 짓눌렀다. 첫날 오전을 시차적응에 무참히 실패하고 말그대로 책상위에서 사경을 헤맸을 때 나는 내가 충족시킬 보스가 알아야 할 중요한 컨텐츠 두어개를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핸드폰 녹음기를 켜서 다 기록하기로 했다. 장장 일주일간의 기록이 그렇게 남겨졌다. 숙소에 돌아가면 저녁 한톨 먹을새 없이 음성 기록을 들으며 미팅미닛, 회의록을 정리해서 부리나케 한국사무실로 넘겼다.


그 때 나는 유능한 사람이고 싶었다. 유학파도, 그럴듯한 스펙의 보유자도 아닌 내가 왜 너네랑 뭐가 그렇게 다른데 외치고 싶었다. 전 직장에서 숱하게 만나온 그런 금빛 이력서에 심지어 재력까지 타고난 금수저 동료들 사이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건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었다고 믿고싶었다. 실력으로 존재하고 싶었나보다. 그 때 나는 불과 30대를 시작하는 어른이 였다는 걸 돌아볼 때 마음이 짠해진다. 사람들의 시선 대신 스스로를 속박한 열등감과 컴플렉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전투적으로 커리어를 점프하며 갖은 수고를 짜내고 겨우 그들 틈에 한자리 꿰 차게 된 것은 나에게는 큰 자랑이나 한 컷의 장면처럼 영광은 짧았다. 지난하게 길고 길었던 나의 기억은 당시 나를 옥죄던 열등감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그렇지만 해내고 싶은 욕심, 나의 소화기가 먼저 알아채는 스트레스 그 모든 것 보다 더 터져나와버린 나의 인정욕구였다. 나는 깨고 싶었다. 내가 왜 잘할 수 없는가에 대한 내가 가진 편견을 깨고 싶었다. 그런 내안의 전투가 시끄러웠다.


초여름 첫 출장의 경험처럼 30대 대부분 나는 나의 감정적 동요를 억누르는 나와 새로운 시작을 성공적으로 열고싶은 미친 욕망의 직장 여성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또 하나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 건 그 때의 숙소다. 본사 주변의 가장 비싼 호텔이었지만 건물 내외관과 방안의 카페트 수준을 보면 욕이 나올 정도였다. 족히 50년은 되어보였다. 미국이 남북전쟁 할때에도 왠지 그자리에 있었을듯한 호텔이었다. 그곳에서 매일 밤 노트북 타자로 미닛을 정리하던 나에게, 저녁 식사 마땅히 사먹을 공간도 없어서 체류했던 일정 내내 저녁을 굶고 말았다. 호텔 일층에 펍 같은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한국돈 3만원이나 하는 수제 햄버거를 사먹을 순 없었다. 절약이 몸에 벤 내가 허투로 돈을 쓰는 일을 할 수 없는 건 편집증적인 증세 같기도. 나는 매일 미팅에서 "내가 과연 이 잡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숱한 내적 고민으로 가뜩이나 나쁜 나의 소화기가 파업을 해 버렸다. 저녁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그 기업에서 5년을 넘게 버텼지만 나의 위 건강을 안드로메다를 건넌것만 같았다.


다시 돌아와 2024년 5월 오늘 나는 아무도 모르는 지금의 이 도시에서 좁다란 숙소에 앉아 오늘 내가 맡아서 해낸 새로운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길을 모른다. 무언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잘해내고 싶고, 새롭게 찾은 이 길에서 답이 분명 존재한다 믿고싶다. 하지만 그것은 직장안에서나 지금처럼 프리랜서로 뛰는 밖에서나 세상은 녹록치 않다. 나는 여전히 또 갈등하고 고민한다. 그런 것이 삶이라고, 일의 여정이라고 나의 이성은 말하지만 낯설고 삭막한 이 느낌 만큼은 지울 수가 없다. 저녁을 굶기로 했다. 지난주부터 오늘 내일 진행하기로 한 이 일을 준비하면서 꿈에서도 멈추지 못하더니 역시나 위가 역할을 안한다. 타고나길 밤에 무얼 먹는 것을 좋아해 본적이 별로 없어 다행이었다.


나이 마흔이 되면 다를 줄 알았다. 나는 새로운 길에서 또 길을 잃은 느낌이다. 낯선 숙소에서 내 몸을 소화제와 토마토로 달래며 내일 일을 걱정한다. 경력단절의 기억은 망상적 속상함이었다면 지금의 새로운 도전기의 느낌은 왠지 아는 맛의 씁쓸함이다. 또 그맛이면 어떡하지 생각이 드는데, 안먹을 수는 없고 잡념이 든다. 멀고 험해 보이지만 물론 예전만큼 외롭지는 않다. 그간 가족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 셋을 떠올려본다. 또 다시 집에 가고싶어진다. 애를 셋이나 맡기고 호기롭게 떠난 여행인데 만 하루를 못가 가족들 생각에 처량함을 적신다. 나는 왜 이렇게 쿨하지 못한 사람인가 생각한다. 그게 나인걸. 오늘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그냥 오늘도 막연히 근거없이 나는 잘하고 있다 말해본다. 나는 잘하고 있다. 올해는 실험적인 무어든 해보고 나의 감과 결을 찾아가도록 하기로 한 해니까. 그러니까 겁먹지 말자. 나는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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