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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nda 린다 Nov 01. 2022

2022.10.29

인터넷을 켤 때마다 밀물처럼 지난 토요일의 참사의 뉴스와 영상이 쏟아지는 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정도다. 그날 밤 나는 밤을 꼬박 새웠다. 아기들을 재우고 필요하지도 않은 기저귀 가방의 B급 세일 포스팅을 보고 홀린듯이 가방 디자인을 비교하고 있었다. 양배추 디자인이 나은지 당근 디자인이 나은지를 고르며 한시간 쯤이 지났을까? (결국 어떤 것도 사지 않았다) 무심코 인터넷에 뜬 속보 한 줄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몇십명이 서울 한복판에서 압사라니.. 영화의 소재로 나왔으면 이거 뭐 이렇게 비현실적이야 라며 욕을 먹었을 시나리오였다. 그만큼 믿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좋은 예감이 짙어지고, 결국 뜬 눈으로 결국 새벽 4시 사상자 숫자를 보고 또 올게 왔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옆에는 곤히 잠든 첫째 숲이가 코를 드렁드렁 골고있었다. 아이의 얼굴을 매만지다 눈물이 나왔다. 어떻게 어째서 이런 일이..


우리 아이가 혹은 내가 당했다면. 지금을 사는 대한국민 국민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뉴스 속 처절한 절규와 화면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비이성적인 댓글들 이 혼란스러운 장면에서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진정 의문스러웠다. 내가 믿어왔던 사회와 국가가 과연 맞는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의 애통함과 비명이 곳곳에 들리는듯 하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이태원이 익숙하지 않은 나도 이태원을 갈 적마다 들르던 골목이었다. 눈에 익은 상점과 길목에서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더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그 청년들을 하루 아침에 도심 한가운데서 잃은 부모는 지금 어떤 정신일까. 아이를 셋을 낳고 키우고 있는 나이지만 감히 가늠할 수 없다. 피끓는 심정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살아나갈 사회에 또 다시 깊은 회의감이 몰려온다. 불과 며칠전에도 비슷한 상념에 나를 다잡으며 다시 긍정적으로 살자 다짐했었는데 최근 들어 이토록 힘든 일이 없다. 며칠전 남편에게 그런 이야길 한 적이 있다. 어느 시대든 세상의 힘든 일의 총량은 같았었는데, 지금 정보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더 많이 노출되어 온 것일까? 아니면 현대 시대일 수록 사회와 인간이 더 가혹해지는 것일까? 남편도 쉽사리 대답 하지 못했다. 나만 존재 했다면 이유도 의미도 찾을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문제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이 힘든 세상에 갓 발을 딛은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희망을 품고 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의 조각들이 부유한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이유는 무얼까. 요즘 나의 큰 물음표들이다.


반짝 반짝 빛이 났을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귀하지 않은 이 없었을텐데..

무엇을 좋아하는 너였을까, 무엇이 궁금한 너였을까...

꽃 같은 너희들을 먼저 보내고 지금 어디선가 피 토하고 있을 부모님들이 걸려 더 애통하다.

좋은 세상이 있다면 꼭 다시 만나기를 기도할게.


아이들을 탓하지 마세요.

우리도 아이였고, 또 청년이었으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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