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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Sep 05. 2022

며느리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상한 며느리 문화'(1)

온전한 이방인이 되는, 시댁 생활...

 내가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지긋하여 정년을 앞둔 남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김선생은 시부모님한테도 사랑 많이 받지? 이렇게 애교도 많고 어른들에게 잘하니, 시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겠어. 복덩이가 들어왔다고 하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을 뻔 했으나, 사회적인 체면을 생각해서 “하하하. 시댁에서는 이렇게 잘 안 되더라고요.”하고 부끄러운 척 웃고 말았다. 그건 굉장히 가식적이고 소극적인 답변이었다. 속마음으로는 “모르는 소리요. 아휴. 시댁은 학교랑 완전 다르죠.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는 난생 처음이예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시댁에서 전혀 예쁨을 받을만한 행동을 하는 며느리가 아니다. 오만한 며느리다.

 


 

 변명을 하자면, 나도 처음부터 오만한 며느리는 아니었다. 여기에도 나름의 역사가 있다.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저녁 식사를 먹고 난 후 설거지는 당연히 며느리의 몫이라 생각하여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면 시아버님은 “아이고, 우리 선생님 며느리. 손에 물 묻히지 말고 고무 장갑 벗고 저리 가 앉아 있어.”하셨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오는 주말이면 반찬이 8개도 넘는 진수성찬을 차려주시는 것도 부족해, 식사 후에는 설거지도 하지 못하게 내 곁으로 와서 장갑을 벗기고 거실로 밀어내셨다. 나와 신랑은 시아버지가 설거지를 하시고, 시어머니가 과일을 깎아 오실 동안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쇼파에 앉아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는 시댁에서 ‘교사 며느리’라고 극진히 대해주시는 것이 어찌나 감사하고 몸둘바 모르겠던지. 아직 ‘이방인’으로서 시댁에서 나의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한 시기였다. 호의가 마냥 너무나도 감사한 시기였다.


 나는 결혼한 지 한 달만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배가 불러오면서 시아버지는 ‘배도 부른 며느리가 무슨 설거지냐. 허리아프다.’라고 하시며 더욱 강경히 설거지를 못하게 하셨다. 가끔 시아버지가 자리를 비우실 때면 얼른 눈치껏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곤 했고, 시어머니는 마치 ‘며느리도 우리 식구가 되었는데, 이제 설거지를 좀 해야지.’라고 생각하시는 것처럼 설거지통에 그릇을 쌓아주시며 “이건 여기다 올려 두어라. 그리고 저건 좀 뜨거운 물로 싹 헹궈야 할거야.”하고 알려 주셨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지난 날들 동안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임신도 해서 몸도 무겁고, 일도 하러 다니는데, 무슨 설거지야. 우리가 해야지.”라고 말씀하시고, 시어머니는 “그래도 며느리는 며느린데 시댁에 와서 설거지도 한 번 안 합니까?”하며 의견이 충돌하는 장면을 상상했었다.


 그 때 대개 신랑은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 ‘그 때 설거지는 신랑이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며느리 문화’에 빠져 있어서 사지가 멀쩡한 남편이 있음에도 임신을 했지만 며느리인 내가 당연히 시댁에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 줄 알았고, 시아버지가 그 설거지를 말리며 며느리에게 ‘사랑’과 ‘배려’를 베푸는 상황이 과분하다고 생각했었다. 우리는 모두 ‘며느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인지라 신랑 또한 임신한 아내와 아버지가 설거지를 두고 서로 하겠다고 실랑이 하는 소리를 들으며 ‘며느리 노릇을 하려는 부인’과 ‘며느리를 사랑하는 마음씨 좋은 아버지’를 둔 다정한 집안의 분위기에 취해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시아버지의 교사 며느리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배려’는 생각치도 못한 부분에서 나에게 큰 약점이 되었다.


 신랑은 싸울 때면 “우리 부모님이 너한테 설거지도 한 번 안 시키시고 얼마나 잘 해주시는데!”라고 했고, 시어머니는 명절에 떡방앗간에서 만난 많은 지인들에게 “우리집 교사 며느리는 시집와서 설거지도 한 번 안 해 봤어. 시아버지가 설거지를 다 해.”라고 하셨다. 물론 시어머니의 이야기는 떡방앗간에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시댁에 가서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가는 나에게 모르는 할머니가 다가와서 “00이 엄마야? 애기 보니까 알겠네. 며느리가 왜 설거지도 한 번 안하고 시아버지를 시켜. 에휴…. 떡방앗간에 앉아있는데, 시어머니가 그러더라고.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는 며느리가 좀 해야지. 시아버지 체면이 뭐가 돼.”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배신감이 들었었다. 그 뒤로는 시댁 근처에서 유모차를 끌고 놀이터를 갈 때마다 나는 모르지만 나의 아이를 아는 시부모님의 지인들이 나를 알아보고 눈으로 욕하는 건 아닐지 눈치를 봤었다. 그 얘기를 들은 건 신랑이 직장을 그만 두고, 한창 답답하게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나의 억울함은 극에 달했었다. ‘직장 그만 두고 공무원 공부하는 아들 이야기는 창피해서 차마 못하는데, 혼자 돈벌이하며 육아하는 며느리가 설거지 안 하는 것은 자랑처럼 얘기하시는구나.’ 하고 서운했었다.


 뭔가 '며느리의 문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시댁에서 겪는 차별과 편견들은 어쩌면 '며느리는 그래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었고, 심지어 나조차도 그것이 다고 생각하다가, 그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내’가 되고 나서야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몸부림을 치며 억울해 하는 것이라 견디기 무척 힘들었다. 물론 지금도 종종 그러하다.


 시댁에서 나는 이제 막 그들만의 문화에 들어온 새내기였다. 시댁의 사람들은 ‘어디 어떻게 하나 볼까?’하고 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 문화에 적응하려 노력하는지 점수를 매기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들 같았다. 나는 며느리라는 ‘을’의 옷을 입고 그들의 오디션에 참여해야 했고 기대에 부흥하지 않으면 낮은 점수를 받으며 ‘이것도 못해서야...’와 같은 뉘앙스의 말을 들어야했다. 애초에 오디션에 참여하지 않는 옵션은 없었다. 시댁에 가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술 잘 먹는 며느리가 들어와서 나랑 같이 술이나 좀 마셔보고 싶었는데. 너는 직장 다니면서 술도 안 배우고 뭐 했냐.”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말이었고, 시어머니도 나를 크게 타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던 작은 소망을 비추어 본 것일 뿐이었지만 우리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고, 내가 ‘을’이기에 상처를 입었다.


 술을 좋아하는 시댁 식구들은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런 때면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나는 늘 안방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외톨이처럼 있었다. 안주로 치킨이나 과일 같은 것을 곁들일 때면, 안방에서 아이를 보는 나에게 "며느리야. 이거 먹어라."하고 몇 조각을 접시에 담아 건네 주는 것도 먹기 불편한 일이었다. 언젠가는 안주로 순대와 간을 사오셔서 나에게도 “며느리야. 너도 같이 앉아서 먹어라”하고 권하기에 앉아서 두어 점 먹었다가 시어머니가 조용히 안주 접시를 신랑 앞으로 밀어 놓는 것을 보고 ‘아, 아까 그 말은 인사치레였구나. 눈치 없기는.’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겨우 참고 안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보았었다. 서운한 마음이 한 가득이라 집으로 돌아와 신랑에게 말을 했더니 “우리 어머니가 언제 접시를 내 앞으로 갖다 놔? 안 그랬거든. 괜히 혼자서 그래. 우리 어머니 그런 사람 아니야.” 라고 했다. 나는 이 집단에 '홀로' 굴러 들어온 이방인이 확실했다.


 임신을 해서 생고기를 먹을 수 없었던 때 시부모님은 술안주로 회를 사오셔서 신랑과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곁에서 아이들을 보는 나에게도 한 점씩 권했었다. 나는 "임신 중에는 날 것을 먹으면 안 된대요. 그리고 저 회 별로 안 좋아해요. 괜찮아요."라고 말했었다. 시어머니는 내 말을 잘못 들으신건지, "너는 직장에 다니는 애가 회도 못 먹고, 뭐했냐?"라고 하셨다. 평생 주부로 살아오신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직장에 다니면 술도 배우고, 회도 잘 먹게 되는 줄 아셨던 걸까?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간절하게 아들 손주를 기다리던 시부모님이 둘째도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내심 실망을 하셨는지 식사 자리에서 "00이는 결혼 했냐? 애는 낳았고? 뭐 낳았냐? 아이고, 어떻게 한 번에 떡하니 아들을 낳았을까. 00이는 참 좋겠네."해서 그 날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한참 체한 것을 토했었다.


 한번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었다. 내가 혼자 돈을 벌고 있었고, 어려운 형편에 성과금을 모아 여행을 간 것이었다. 하루는 횟집을 가서 회를 먹는데, 시부모님과 나와 큰 아이가 한 테이블에 앉고 조금 늦게 들어온 신랑과 둘째 아이는 곁에 있는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종업원이 들어와 한 상을 차릴지, 두 상을 차릴지 물어보기에 신랑이 한 상만 차려달라고 했고, 시부모님은 내 앞에서 신랑 앞으로 자리를 옮겨 신랑과 한 상을 만들었다. 밑반찬이 나오고 곧 이어 회가 나왔다. 내 앞에는 빈 테이블에 상추 하나가 깔린 접시와 숫가락, 젓가락 뿐이었다. 식사를 하던 시부모님이 내가 아이를 먹이느라 먹지 못하는 걸 알고 "며느리는 왜 안 먹니? 어서 먹어라."했고, 신랑이 내 앞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걸 알아채고 "자기야, 얼른 먹어." 하고 내 앞 접시에 새우 튀김과 회 몇 점을 올려주었다. 그 식사를 내 카드로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정작은 구차하게 밥을 얻어먹은 기분이었다.


 시댁에서의 식사는 그러한 연유로 트라우마처럼 눈치를 보며 먹게 되어 불편하다. 그렇게 눈치를 보며 먹는 식사라면 먹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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