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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Oct 03. 2020

글 쓰는 고양이



1. 닝겐과 고양이


추석을 맞아 세 가족이 모였다.  


가족 1 : 엄마, 아빠, 다미(고양이, 10살)  

가족 2 : 동생, 모찌(고양이, 2살), 앙코(고양이, 2살)

가족 3 : 나 (셰어하우스 사는 1인 가구)


집은 색색깔의 털이 날리고, 별별 주파수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고양이 소굴이 되었다.  




2. 캣워크


모찌는 동생이 키우는 흰색 고양이다.


"ㄹㄹ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ㅅㅎㅆㅆ새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3ㅡ                            <<<<<<<<<<<<ㅁㅋㅋㅋㅋㅋㅋ”


이 문장은 방금 모찌가 노트북 키보드를 밟고 지나가며 남긴 흔적이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라 말릴 생각도 못했다. 아니 말릴 틈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닌데 텅 빈 화면에 첫 문장이 너무도 쉽게 써지는 그 순간이 왠지 속 시원해서 보고만 있었다. 뭘 써보겠다고 노트북 앞에 앉아는 있는데 도무지 쓸 기미는 안 보이고, 멍 때리고 앉아 폼만 잡고 있는 닝겐을 응시하다가 답답했을 수 있다. 그러다 못 봐주겠다 싶을 때쯤,  옜다~ 하고 첫 문장을 던져주고 간 걸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한동안 주위를 맴도는데, 저 문장은 왠지 지우면 안 될 것 같았다.  


"ㄹㄹ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ㅅㅎㅆㅆ새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3ㅡ                            <<<<<<<<<<<<ㅁㅋㅋㅋㅋㅋㅋ”  


이 문장은 모찌가 밟은 것이고, 모찌가 쓴 것이다. ‘밟다'와 ‘쓰다’가 같은 말일 수 있구나. 네 다리를 교차하며 키보드 위를 런웨이 걷듯 가로지르다가 잠깐 멈춰 서서 포즈를 취했고, 이내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퇴장했다. 모찌의 걸음걸이는 어떤 리듬을 가지고 화면 위에 자취를 남겼다. 앞 발로 문장을 시작하여 뒷발로 문장을 끝맺는, 네 발 동물의 작문 퍼포먼스가 키보드 위에서 순식간에 벌어졌다. 모찌가 남긴 문장에 무슨 메세지가 담겨 있을 것만 같아 곱씹어 보게 된다. 어떤 의미가 연상된다.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해설을 붙인다. 모찌를 인터뷰한다. 인디자인을 배운다. 독립출판 수업을 듣는다. 출판 등록을 한다. 그러다 보면 이런 책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제목 : 모찌가 밟아 쓴 문장
지은이 : 모찌 (2019~)
차례
1) 프롤로그 : ㄹㄹ
2) 본문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ㅅㅎㅆㅆ새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ㅑ3ㅡ                            <<<<<<<<<<<<ㅁ
3) 에필로그 : ㅋㅋㅋㅋㅋㅋ
4) 해설 : 네 발 동물의 작문 퍼포먼스 (권경덕)
5) 모찌 인터뷰 “미야우, 미야우"
6) 모찌 연보 (2019~)

1판 1쇄 2021년 1월 1일
펴낸곳 냥이북스


모찌가 밟아 쓴 문장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안에 담긴 메세지는, 모찌가 몇 걸음의 일필휘지로 쓴 문장의 즉흥성과 우연성을 곱씹으며 각자가 알아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일단 처음과 끝을 주목해 본다. ‘ㄹㄹ’은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의 입말이다. 닝겐아 내 얘기를 좀 들어봐, 하며 앞 발을 키보드 위로 올려 놓는다(프롤로그). 그리고 해독 불가능한 본문이 주욱 이어진다. 마지막은 ‘ㅋㅋㅋㅋㅋㅋ’ 하며 쓸데없이 진지한 척 폼 잡는 닝겐에게, 닝겐의 언어로 박장대소를 날린다. 문장을 끝맺는다. 그리고 슬쩍 뒷 발을 뺀다.(에필로그)  



3. 묘생(生) 2년차와 인생(人生) 34차의 대화


옆에 있는 모찌에게 인터뷰를 시도해본다.  


아까 정말 왜 그런거야?  

미야우, 미야우.  

내 해설이 마음에 들어?

카아아악.카아아악  

간식 먹을래?

미야우, 미야우, 미야우, 미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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