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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Oct 17. 2020

오무려 버려주십시오


셰어하우스 1층 게시판에 이런 쪽지가 붙었다.



    재활용

    오무려 버려

    주십시오.

    벌레가 끼고

    뒤져지기 쉽습니

                    다.



글귀는 노란 포스트잇 위에 까만 네임펜으로 쓴 것 같았다. 선이 있는 종이였지만 딱히 반듯하게 맞춰 쓰려고 하지는 않았고, 마침표는 여러번 눌러 쓴 것처럼 보였다.   


나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이 문장 앞에 한동안 서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느껴지는 어떤 신기한 어감 때문이었는데 '왜지? 뭐가 신기하지?' 하며 반복해서 발음해보았다. 두 곳에서 유독 입이 간지러웠다. ‘오무려’와 ‘뒤져지기’였다.


'오무려'를 ‘오무리다’로 네이버 사전에 쳐봤다.


‘오므리다’의 의미로 ‘오무리다’를 쓰는 경우가 있으나 ‘오므리다’만 표준어로 삼는다.
[표준어 규정 2장 4절 17항]


그러니까,


'오므리다'가 표준어지만 ‘오무리다’를 쓰긴 쓴다. ‘오무리다’라고 절대 쓰면 안되는 건 아니고, 쓰는 경우도 있으나 표준어는 오직 ‘오므리다’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표준어는 아니지만 쪽지에 적혀 있는 ‘오무리다'를 보다 보니 왠지 '다자이 오사무'도 떠오르고, ‘무'가 ‘므'보다 더 입술을 모아야 해서, ‘오무리다'가 ‘오므리다'보다 좀 더 확실하게 무언가를 오무려야 할 것 같아서, 오히려 표준어보다 느낌이 잘 살았다. 쪽지를 쓴 사람도 표준어를 잘 알지만 규정에 얽매이기 보다 효과에 집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덜 오무려진 재활용 봉투를 보며 속으로 ‘아, 좀! 잘 좀 오무리라고!’를 수업이 외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무려’를 나름대로 상상하고 이해하고 나면, 뒤이어 ‘뒤져지기'가 나온다. 덜 오무린 재활용 봉투가 인적이 드문 시간에 누군가(고양이? 사람?)로부터 뒤져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보다 보니 자꾸 ‘뒤져’에 악센트가 붙는 것 같아서 잘 오무리지 않으면 ‘뒤져!’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뒤져진다는 수동형 표현에서 재활용 봉투 입장에서도 생각하는 글쓴이의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짧은 글귀를 읽는 잠시 동안에, 간지러운 입술을 씰룩이며 ‘무’와 ‘므’의 차이를 음미하다가, ‘뒤져'를 발음하며 조금 섬뜩해하기도 하고, 여러번 꾹 꾹 눌러 쓴 것 같은 마침표에서 이 글귀를 쓴 사람의 진지함을 보기도 했지만, 여러 모로 신기하고 재밌는 글귀였다.


앞으로는 뭐든 더 잘 오무리는 세입자가 되어야지 다짐했고, 입가에 남은 '오무', '오무'의 여운을 느끼며 집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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