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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Apr 11. 2022

섹스리스(sexless), 혹은 거의 모든 것과의 섹스


      

마지막 섹스 이후로 섹스리스의 삶을 살고 있다. 섹스만 안 하는 게 아니라 연애도 하지 않고 단 한 차례의 썸도 없었다! 무성애자가 되거나 비연애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왠지 그런 쪽으로는 좀 시큰둥해졌다. 더 정확하게는 '섹스', '연애', '썸' 같은 말과 그 말을 둘러싼 이야기가 지겨워졌다. 결정적으로 나 자신의 섹슈얼리티(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에  싫증이 났다. 시큰둥하고, 지겹고, 싫증이 나는 상태로는 어떤 관계도 맺기 힘들었다. 나는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따분했다. 내가 입고 있는 갑갑한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종종 생각했다.      



농밀한 세미나


세 달 전의 나는 '성생활과 페미니즘 담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농밀한 세미나> 모집글을 읽고 있었다. 섹스, 자위, 성생활, 페미니즘, BDSM, 성적 동의, 기이한 욕망 등의 소재들로 구성된 책과 영화 리스트가 흥미로웠다.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이라는 '갑갑한' 정체성으로 '힙하고, '핫하고', '퀴어한'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문화, 소수자 운동에 어떻게 접속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품고 세미나를 신청했다.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혹시 그동안 몰랐던 내 안의 퀴어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세미나에서는 1)원시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연애를 살펴보고(가장 공적인 연애사), 2)성적 의사소통 기술과 성적 동의 개념을 활용하여 풍요롭고도 안전한 섹스를 위한 지침을 배우고(SM 페미니스트, 성적 동의), 3)어릴적 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여자 주인공이 금속성을 탐닉하는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자동차와 섹스를 하고 아이까지 낳는 SF 스릴러 영화(티탄)를 함께 보았다. 1), 2)의 과정은 주로 반성과 참회의 마음으로 나의 과거 연애와 섹스를 떠올리게 했다. 3)의 과정은 낯설고 충격적인 만큼 나를 꼼짝없이 현재에 머물게 했다.


1), 2)의 과정은 성적 의사소통에 관한 중요한 기술과 언어를 선물해주었고 좀 더 성숙한 연애와 섹스를 상상하게 했다. 3)의 과정은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인간적이지 않은 섹스에 대해 상상하게 했다. 그리고 따분한 섹스리스의 인간은 3)의 과정에서 ‘비인간과의 섹스’라는 테마를 좀 더 확장해보고 싶었다.         


 

http://moontaknet.com  - 문탁네트워크 길드다 텍스트랩



확장된 성 행위     


미생물을 상상해본다. 지금 나의 처지가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 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코로나 이전부터 나는 대체로 혼자 살고, 간헐적으로 외출을 하며, 좀처럼 사람과 밀접접촉하지 않는 유사 자가 격리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조금 늦게, 코로나가 한국에 입성한지 2년 만에야 바이러스 숙주의 자격을 얻게 된 셈이다. PCR 검사 결과(코로나 19 확진)가 문자로 왔고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격리 대상이 되었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대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려 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 쾌감은 열이 살짝 식어 몸이 나른해질 때, 기침을 시원하게 하여 가래를 뱉어낼 때 뿐만 아니라,  0.1~0.2㎛의 크기에 불과한 코로나 입자가 내 몸 속을 휘젓고 다니며 내 안의 작은 세포들과 격렬하게 반응하고 섞이고 흔적을 남기는 모습을 상상할 때 찾아왔다.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혈투로만 그려지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낯선 존재와의 얽힘을 '감염(병원성 미생물이 사람이나 동물, 식물의 조직, 체액, 표면에 정착하여 증식하는 일)이라고만 명명하는 의학적 진단은 어딘가 불충분해 보였다. 몸 속의 미시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으로 관찰할 수는 없으니 언어적으로 상상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의도적으로 분자적인 규모에서의 섹슈얼리티를 가정했고 '확장된 성 행위'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An immune cell (green) engulfing a cell of thrush fungus (orange)



감염 섹스     


린 마굴리스는 <마이크로 코스모스>에서 성은 교미, 생식, 남성, 여성, 젠더와도 무관하다고 썼다. 그녀는 성sex이란 "새로운 개체를 창조하기 위해 한 가지 근원 이상으로부터 얻은 유전물질을 단순히 결합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유전물질의 이동이 있고, 부분적인 융합이 있다면 전부 섹스다. 우리 몸 속에 바이러스가 전염될 때도 우리 몸 세포 속으로 유전 물질이 들어오기 때문에 성이다. 그녀는 또 다른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성적 욕구의 기원은 미생물의 소화불량이었다고 쓴다. 배고픈 원생생물은 종종 주변의 다른 동족을 잡아먹는데, 어쩌다 소화되지 않고 '반쯤 먹힌 상태로' 살아가는 개체가 발생한다. 먹힌 개체는 한동안 자신을 먹은 개체와 어정쩡한 공존의 시기를 거치다가, 어느 시점에 서로의 핵과 염색체를 합병하여 거의 한 몸이 된다. 이는 최초의 수정(짝짓기)이었고 "곤궁한 상태에서 서로 잡아먹다가 염색체가 2배가 된 원생생물이 우리의 조상일 것이다."라는 게 마굴리스의 설명이다. 섹스의 기원은 잡아먹기(혹은 잡아먹힘)이고 오르가즘의 기원은 소화불량에 따른 포만감이었다? 그렇다면 유성 생식 이전의 섹스는 단순히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굴리스가 맞다면 한 개체가 다른 개체와  마주쳤을 때(먹었을 때, 혹은 먹혔을 때) 한쪽이 다른 쪽을 소유, 독점하는 대신 '공생' 관계를 맺는 과정 또한 섹스로 볼 수 있다.      


     

에코섹슈얼     


2016년 호주의 행위예술단 '포니익스프레스'는 에코섹슈얼 목욕탕(ecosexual bathhouse)이라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에코섹슈얼이란 자연을 관능적이고 섹시하게 바라보는 사람, 자연 사물과 성행위를 나누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프로모션 영상을 보면 욕조에 가득 자라 있는 이끼를 어루만지는 사람, 고사리 잎을 머리에 뒤짚어 쓰고 서로를 애무하는 사람, 풀이 무성히 자란 마스크를 끼고 서로를 더듬는 사람 등이 보인다 . 에코섹슈얼 목욕탕에 입장하는 사람은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연물과 상호간의 동의 하에 성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 단, 삽입 섹스는 제외한다. 내가 사는 원룸에도 식물이 있다. 이사 오기 전부터 키운 몬스테라와 디시디아, 집들이 선물로 받은 아비스, 동네 꽃집을 지날 때 사들고 온 작은 다육식물들과 아이비,  작은 올리브 나무. 나는 에코섹슈얼은 아니지만 잎과 흙을 만지고 냄새를 맡다 보면 무언가 오고 가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어쩔 땐 식물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저들과 친족을 맺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기도 한다.     

루스 이리가레는 <식물의 사유>에서 우리의 성적 속성을 "자연적으로 다른 타자를 존중할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체화된 만족"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면서 "식물 세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특수한 정체성을 전통적인 성관계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성적 활동에 충실하고 그에 따라 생동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http://helloponyexpress.com/





동물과의 섹스     


<반려종 선언>은 여자 인간 해러웨이와 암컷 반려견 미즈 카옌 페퍼의 에로틱한 교감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즈 카옌 페퍼가 내 세포를 몽땅 식민화하고 있다. 이는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가 말하는 공생발생의 분명한 사례다. DNA 검사를 해보면 우리 둘 사이에 감염이 이루어졌다는 유력한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카옌의 침에는 당연히 바이러스 벡터가 있었을 것이다. 카옌이 거침 없이 들이미는 혓바닥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 우리 중 하나는 나이가 많아서, 다른 하나는 수술을 받아서 생식하지 않는 여성/암컷female이지만, 우리 둘의 접촉은 분자로 기록된 생명의 암호가 되어 이 세계에 자취를 남길 것이다. (...) 우리는 서로를 살 속에 만들어 넣는다. 서로 너무 다르면서도 그렇기에 소중한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지저분한 발달성 감염을 살로 표현한다. 이 사랑은 역사적 일탈이자 자연문화의 유산이다.”        


Donna Haraway and Caye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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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물, 식물, 동물 등의 비인간은 이미 내 몸 속에, 내 주변에 널려 있고 ‘우리는 이미, 매 순간, 섹스중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면, 왠지 좀 시시하다. 다만 나는 ‘섹스리스’라는 말을 폐기한다. 그리고 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은 당분간 더 많이 낯선 것들과 교감하며 서로를 감염시키는 세계를 상상하며 이루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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