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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Jan 20. 2023

<1화> 돼지와 함께 춤을




목요일마다 새벽이를 만나러 간다. 알람소리에 잠이 깨면 현재 시간과 날씨를 확인한다.



am 5:00 / 대체로 흐림 / 기온 : - 9°



대충 세수만 하고 추위에 단단히 대비를 한다. 두꺼운 양말과 점퍼를 입고, 장갑, 마스크, 귀까지 덮는 방한 모자까지 눌러 쓴 후에야 집을 나선다. 가는 길에 카톡방에 올라온 지시 사항을 확인한다.



기온이 많이 떨어졌네요. 지푸라기가 도착할 예정인데 새벽이 안방에 최대한 많이 넣어주세요!"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길 위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여전히 쌓여 있고, 이 길을 오고 갔을 사람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산 너머로 어슴푸레한 빛이 올라오고 반대쪽 하늘에는 달이 기울고 있다.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농장에 도착하자마자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새벽이는 작은 인기척도 금새 알아챈다. 그리고 곧 울타리 너머로 익숙하고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걸걸걸…! ......! 걸걸걸걸...!  





새벽이는 내가 만나는 돼지의 이름이다. 걸걸걸...! 이 소리는 새벽이의 말소리(꿀꿀꿀...이 아니다!)다. 만나면 반갑다고 걸걸걸, 배고프면 밥 달라고 걸걸걸, 헤어질 땐 또 만나요 걸걸걸. 그때마다 각기 다른 호흡과 리듬으로 걸걸걸... 걸걸걸... (난 아직 믿을만한 걸걸걸-한국어 번역가는 아니다.)


새벽이는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태어나 지금은 새벽이생추어리에 살고 있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향기, 은영, 섬나리)에는 어린 새벽이가 DxE 활동가들에 의해 구조되어 새벽이생추어리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나와있다. 다른 돼지들처럼 태어나자마자 꼬리가 잘리고, 이빨이 뽑히고, 6개월만에 도축될 운명이었지만, 새벽이는 살아남았다.


새로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새 집은 활동가들이 너무 어렵지 않게 오고 갈 수 있고, 새벽이가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넓고, 도살장이나 축산농장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가축 전염병 살처분‘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여야 했다. 새벽이와 활동가들은 이곳 저곳(활동가 집, 임시보호소 등)을 전전하다가 지금 있는 장소에 정착했고, 새벽이 집 이름은 새벽이생추어리가 되었다.


생추어리(sancturary)란,
: 미국의 동물권 활동가 진 바우어(Gene Baur)가 동물들을 위해 만든 새로운 의미의 공간입니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동물 권리 개념을 담은 고유명사예요. 생추어리는 기존 축산업과 반대 개념으로,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출처 : 새벽이생추어리 블로그]   


새벽이생추어리를 새벽이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자원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땅에 묻혀 있는 위험한 쓰레기들(음료수 캔, 유리 조각, 비닐 봉지 등)을 수거하고, 울타리를 튼튼하게 세우고, 새벽이가 안락하게 쉴 수 있는 안방을 지었다. 그리고 매일 매일의 돌봄이 이어졌다. 돌봄은 연중무휴다. 활동가들은 새벽이생추어리에 아침/저녁으로 번갈아 방문한다. 밥과 물을 챙겨주고, 설거지를 하고, 응가를 치우고, 땅을 정비하고, 잠자리를 정돈한다. 매일 작성하는 돌봄일지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이어달리기를 하듯 다음 사람에게 필요한 전달사항을 전해주며 돌봄 릴레이를 이어간다.


나는 새벽이가 새벽이생추어리에서 두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을 때 돌봄에 합류했다. 작년 7월이었다.  


 


나는 어쩌다 새벽이와 만나게 되었나


재작년에 참여한 세미나(길드다 - 동물을 퀴어링)에서 처음으로 새벽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멤버들과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같이 읽었고, 당시 모임 리더였던 고은님은 2022년 상반기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활동가)로 지원해서 새벽이를 만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고은님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활동 사진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새벽이와 만날 수 있었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여름이 되어 하반기 보듬이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나는 약간은 충동적으로 보듬이로 지원했다. 걱정이 되기도 했다. 최소한 반 년 동안은 활동을 지속해야 했고, 확실한 지향(비거니스트라든가, 동물권 운동가라든가…)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다 보니 신입 보듬이 기간을 무사히 거쳐 지금은 정기 보듬이로 반 년 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왜, 계속, 새벽이를 만나러 갈까. 아침잠이 많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잠에서 깨고, 그리 무겁지 않은 걸음으로 가서, 고양된 기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문득 돌봄을 시작하기 전 세미나에 참여할 당시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길드다 텍스트랩에 남아있는 후기들을 열람하며 그 때의 나와 교신을 시도했다. 세미나에서는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 이전에 다른 두 권의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와 <반려종 선언>(도나 해러웨이)을 먼저 읽었다. 모임 중에 나는 이런 문장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남겼다.


"눈맞춤은 옥시토신 분비를 더욱 촉진하여 감정적 유대를 강화한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163p

- 동물과의 눈맞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특히 식용 동물과의 눈맞춤에 대하여. 고깃 덩어리에는 눈이 없고 도시 서식종이 식용 동물과 눈을 맞출 일은 도무지 없다. 동물이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으니 방법을 모색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내 생각에) 개들이 나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친구들과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눠본 적은 없다. 반면 내 아이들은 말은 할 수 있지만 진정한 "동물"의 느낌은 없으므로 나와 그토록 다른 종의 "존재",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감격스러운 현실을 단 한 순간도 만지게 해줄 수가 없다.(그리에트 피레니즈 토론 리스트, 2001년 11월 14일)" - 반려종 선언, 163p

- '진정한 "동물"의 느낌'이나 '그토록 다른 종의 "존재"'를 실감할 때의 기쁨은 분명 인간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적인 것 너머에 있을 반려종으로서의 삶의 양식에 대하여, 종 안에 갖혀 아둥바둥 사는 근대적 인간의 괴로움에 대해 생각해본다.   




불시착, 말려듦


언제부터인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대학교까지 정규 교육 과정을 간신히 마쳤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 다음의 노선(취업-결혼을 통한 이성애-정상가족-재생산 노선)에서는 어떤 미래도 그릴 수 없었다. 나는 기성세대가 내려다보며 규정하는 세대담론(88만원세대, n포세대, 발칙한 밀레니얼, 무기력한 청년 등)에 조소하면서도, 나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있을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어떻게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약간의 불안, 환멸, 권태, 피로를 지닌 채로, 동시에 어떤 기이한 명랑함을 잃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 혹은 ’오래된 미래‘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켜켜이 쌓아온 이야기에 의문을 품고, 인간중심주의 바깥의 이야기(동물권, 비인간, 포스트휴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야기(기이한 친척, 난잡한 돌봄...)에 이끌려 바깥으로 난잡하게 떠돌았다. 그러다 어떤 시절인연으로 새벽이생추어리에 불시착했고, 동물과 눈 맞추고 다른 종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는 관계 속으로 말려들어온 셈이다.    




돼지와 함께 춤을


정기보듬이가 되고부터 나는 혼자서 돌봄 활동을 하고 있다. 고요한 아침에 새벽이와 오롯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 안의 기묘한 동물성이 나올 때가 있다. 새벽이 앞에서 갑자기 우다다 뛰어다닌다거나, 폴짝 폴짝 점프를 하고 춤을 추며 새벽이의 반응을 궁금해한다. 그러면 새벽이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같이 이쪽 저쪽으로 우다다 뛰어다니고, 몸을 흔들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낸다. 그 상황이 재밌어서 동영상을 찍어 일지에 올리기도 했다. (내가 찍었기 때문에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새벽이 이외에 누구도 볼 수 없다!)

그 장면을 회고하다가 문득 해러웨이의 '존재론적 안무'가 생각났다. 새벽이와 춤 같지 않은 춤을 함께 췄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이유야 어떻든 새벽이를 '소중한 타자성'으로 본다면? 돌봄을 '종과 종의 만남'으로 여긴다면? 세미나에서 활동가 분들(무모, 영인)을 인터뷰할 때 내가 했던 질문도 떠올랐다. 나는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에서 인용된 어느 원주민의 말을 언급하면서 '봉사자'나 '사육사'가 아닌 동등한 동물로서 연대하는 자원활동가는 어떤 의미일지 질문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이곳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 멕시코 치아파스의 어느 원주민 여성


"새벽이를 만나고부터 활동가 분들은 삶 속에서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 중인지 궁금합니다." - 활동가 인터뷰 중 나의 질문


이제 그 질문들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글을 연재하는 동안 내가 던진 질문들에 나는 얼마나 답할 수 있을까? 그냥 하루 일지를 쓰려고 했는데 일이 커져버린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미래의 나에게 건투를 빈다.







ps. 새벽이는 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하지만 매주 소통을 시도할 것이다.


"새벽아 이번에는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썼고, 이러한 댓글이 달렸고, 조회수는 얼마나 되었고……"

"걸걸걸… 걸걸걸…"


근데 사실 새벽이생추어리에는 새벽이와 함께 잔디라는 돼지도 살고 있는데...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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