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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킷랩 Dec 17. 2018

진흙탕은 진흙탕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1.
안녕하세요, 버킷랩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입니다.



2.
이 책은 버킷랩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 한주한권에서 마흔 여덟번째로 함께 읽는 책입니다. 이로써 총 13,922(+146)페이지째 함께 읽게 되었네요.

3.
저는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시가 하나 있는데요. 기형도 시인의 ‘기억할만한 지나침’이라는 시입니다. 아래에 시의 전문을 가져와봤는데요.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문학과지성사


어느 눈 오는 밤 퇴근 길일까요? 우연히 지나가는 건물들 사이에서 아직도 불이 켜진 사무실에 눈길이 갔습니다. 사무실 안에는 서기로 보이는 남성이 혼자 울고 있네요. 나의 인기척을 혹시라도 눈치챌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무안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오히려 내쪽에서 그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감정의 순간의 흐름을 깨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어 숨까지 죽이게 됩니다. 왜인지 그 사람이 울음을 그치는 것을 다 지켜보고서야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는데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이번에는 내가 그 남성처럼 눈 오는 창 안쪽으로 텅빈 사무실에 혼자 있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보았던 우는 남자가 느꼈을 슬픔이 더욱 더 크게 다가옵니다.

4.
방금 소개해드린 이 시, ‘기억할만한 지나침’처럼 기형도 시인의 작품에는 그가 지나온 기억들이 소재로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단어로 난해하게 묘사되어서 상황 파악이 힘들다거나, 극단적으로 피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화자의 감정을 유추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있었던 일들을 있었던 대로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의 시 속에 놓여 있는 화자의 상황에 들어와 있는 듯한 리얼함을 느낍니다. 

그의 시 ‘엄마 걱정’을 예로 생각해보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요, 아주 쉬운 단어들로 엮인 이 시는 불과 다섯 연 만에 우리를 찬 바닥 위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올 때가 됐는데 오지 않는 엄마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어린 아이 시절로 보냅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문학과지성사


5.
이처럼 그의 시들은 리얼합니다. 책의 뒷편에 실린 문학평론가 김현교수의 말을 밀리자면 기형도 시인의 시들은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걸치고 있는 미성숙하고 흉한 작품들과는 차별됩니다. 


좋은 시인은 그의 개인적·내적 상처를 반성·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러나, 자기의 감정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기형도의 표현을 빌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를 벗지 못한다. 그것은 보기에 흉하다. 그것은 성숙하지 못한 짓이기 때문이다.

김현의 해설 중에서


바로 이 리얼리즘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기형도 시인만의 미학세계를 형성되는 구심점이 됩니다. 같은 평론의 말을 빌려볼 때 기형도 시인은 “현실적인 것을 시적으로 만드는, 혹은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적이란 것이 따로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만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해주는 현실주의자”로써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6.
그리고 독자들이 기형도 시인의 작품을 통해서, 마치 그가 눈 오는 밤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울고 있던 남자의 마음을 헤아렸듯이, 독자가 시인이 보여주는 건조한 현실 속에서 함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시인이 그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 까지, 자신의 기억을 반복 또 반복하며 이 불행의 인과관계를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자신의 기억을 마치 타인이 겪은 사건 마냥 덤덤하게 서술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허무함에 공감할 수 있음이 아닐까요.

7.
그의 유고시집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애썼던 김현 교수는 ‘누군가가 기형도의 길을 따라갈까봐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가엾은 세상을 읊조리리라 생각됩니다. 겨울 바람이 콧망울을 얼릴 때면 생각나는 책,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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