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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in Oct 22. 2023

<밑바닥에서>를 읽고

닮은 들 다른 두 세계를 탐구하다


저자소개






김수련은 대한민국 간호사다. 그녀는 1991년에 태어났고, 빼어날 수秀에 단련할 연鍊자를 쓴다.




그녀는 (한국) 중환자실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미국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녀가 (한국) 간호사로 7년간 일하며 겪어온, 아니 겪어내야만 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코로나시절 병상부족과 그에 따르는 간호사들의 어려움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문학창작을 전공했다고 한다.










문을 열며






저자에 대한 정보를 나열한다고 해서 그 책이 저절로 읽혀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책이 자라나게 된 뿌리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뿌리는 주로 단단한 땅 속에 파묻혀져 있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동시에 나는 이런 저자소개가 이 책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뿌리의 모양만으로 나무의 줄기나 잎들을 알아낼 수 없듯이, 작가의 과거나 이력들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대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아름답게 슬프다'.(반대도 성립한다.) 그말인 즉슨, 그녀가 잠시나마 몸담았던 문학계의 흔적이 그녀의 글들에 녹아있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그녀가 책 속에 담아낸 세계가 혹시 허구로 읽혀질까봐. 너무나 생생한 그 인물묘사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의 나열들이 가공된 것으로 느껴질까봐 말이다. 




사실 어떤 허구는 진실되기도 하다. 또 어떤 사실들은 진실과는 멀 때도 있다. '소설쓰고 있네'라는 어느 정치인의 말에 소설가협회가 격분한 일이 있었다. 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그 허구라는 '창'을 통해서 진실을 바라보게 해준다. 그런데 김수련의 『밑바닥에서』는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고발이자, 시론이다. 김수련은 날카로운 사실들을 조각들을 모아 전시해 놓은 설치미술가다. 나는 『밑바닥에서』 제목의 전시작품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프다. 실제로 '삼장일루'했다. 세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눈이 붉게 충혈됐고, 덕분에 책을 내려놓고 나의 현실을 돌아보게 했다. 교사로서, 나의 현실도 간호사로서 그녀의 현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자각을 하고나서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미술)작품은 사람들을 각성시킨다. 




돌이켜보면, 나는 간호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언제나 환자로서 피상적으로만 만났지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일들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병원은 언제나 빨리 벗어나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독서가 이 책과 이 책이 쓰여지게 만드는 간호사들의 현실에 무언가를 보탤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글은 필연적으로 서평이나 리뷰이기 보다는 또 다른 고발이나, 시론에 가깝다. '돌봄및 감정 노동자'로서 교사가 감내하는 사회적 피로가 누적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방식의 서평이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발을 내딛으며






요즘엔 교실에서 발내딛기가 어렵다. 여기서 발내딛기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는데 여러가지 생각이 들고, 그런 생각들은 꼬리와 꼬리를 물어 잠자리까지 따라온다.




 ’아 오늘 이런말은 괜히 했나?‘




민족시인 이육사가 말했듯, ‘한 발 제겨 디딜 곳조차 없‘게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모든 말을 자기검열한지는 꽤 됐다. 자기검열은 자기반성과 다르다. 검열은 외적인 압박으로부터 시작된다면, 반성은 자기 안에서부터 시작한다. 원형감옥 판옵티콘의 죄수들은 간수들의 시선을 의식하다가, 그런 시선이 부재하는 순간에도 자기 스스로 자신을 검열한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자기검열‘이다. 반성은 나를 성장하게 하지만, 검열은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렇다. 지금 이 시대의 교사의 성장은 가로막혀있다. 불안한 교사들은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리고는 아마 교사이기를 포기하고 공무원이 되는 것을 택할지도 모른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취하는 것이 바로 '방어기제'다.




"잘못 설계된 아동복지법과 아동학대처벌법 때문에 교사는 불안한 직업이 돼가고 있다"(정재석 전북교사노조위원장)




학생의 본이 되는 교사로서 바른 언어사용과 행동은 당연하다. 다만, 교사는 말과 행동,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지 자신의 말과 행동, 자신의 삶을 저당잡힌 채로 일해야 하는 채무자는 아니다. 김수련이 지적하고 있듯이, 경계가 애매한 일들은 모두 교사들에게 온다. 권한과 권리는 없고 책임과 책무만 늘어나는 상황이다. 관리자나 동료가 이런 책임과 책무를 나누어져줄 것이라는 기대는 오히려 배신감만 불러일으킨다. 각자도생의 문법이 교직사회에서도 마치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발을 빼며






나는 김수련을 지지한다. 그녀가 (한국)간호사는 그만뒀지만, (미국)간호사로서 일하고 있다는 점을 특히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꿈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했다. 명사는 대개 직업으로 귀결된다. 간호사나 의사, 교사나 판사처럼. 그녀는 돌보는 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가 (한국)병원에서 발을 뺀 것을 그 누구도 도망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도망이라기보다 망명에 가깝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교직사회에서도 비슷한 '망명'들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정확한 통계수치는 집계되고 있지는 않으나, 이른 나이에 의원면직을 한 교사들을 여럿 봤다.(물론 직접은 아니고, 유튜브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한 예로, 한국에서 중등 영어교사였던 어떤 선생님은 핀란드에서 학위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복직 대신 의원면직을 했다. 그 후 그녀는 현재 영어관련 스타트업을 론칭했다고 들었다. 나는 이 선생님을 지지한다. 중학교 '영어선생님'이라는 명사대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동사를 택했다. 물론 많이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는 그녀의 후일담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녀와 같은 사람이 늘어나야한다고 생각한다. 목이 마른 곳에서는 3일은 산다. 그러나 꿈이 말라가게 만드는 곳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을 나가며






서평이라고 써놓고, 서평을 쓰지 않은 것 같아 민망하다. 서평에 딱 정해진 양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례있어야할 것들이 너무 많이 빠져버린 제사상같다. 요즘 제사상에는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들이 올라간다고는 한다. 그래도...를 생각하는 나는 변화하기엔 너무 나이들어 버린걸까?




사실 김수련과 나는 거의 동년배이다. 아마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을테고, 같은 유행가를 듣고, 같은 사건 앞에 아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 때 문학창작을 공부했었고, 나도 한 때 문학창작을 업으로 삼고 싶어했다. 이런 나와 그녀가, 성별이 아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용기'일 것이다. 나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 당당히 말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거니까. 나 또한 귀찮아지니까. 나도 그녀처럼 귀에 벌이 들어와 앉은 적이 있었다. 세 명의 부장이 하는 일을 동시에 맡았을 때다. '메니에르(의증)'이라는 글자가 진단서에는 써있었다. 2주간의 병가기간 동안 몸도 마음도 불편했다. 단추가 잘못 채워진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다시 돌아왔지만, 분위기는 싸늘했다. 누군가 내가 해야할 일을 했었고, 그것 때문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단추구멍부터가 잘못 봉제되었음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건 어느정도 할 만하다. 좀 끼이면 손으로 잡아내리면 되고, 흘러내리면 추켜올리면 되니까. 그러나 이렇게 입던 옷을 후배들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개운치 않다. '봉제가 잘못된 옷'은 여전히 소수의 희생으로 그럭저럭 학교에 잘 입혀져 있다. 그러나 단추가 하나씩 튿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툭 




왜 이전처럼 희생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목소리와 함께. 








서평자 소개






나는 대한민국 교사다. 1990년 이전에 태어났다. 




그는 10여년년째 초등학교에서 일하고 있으며 현재는 12살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이다.




교사가 되기 전엔 교사가 되는 꿈을 단 한번도 꾼 적 없지만, 교사가 된 이후로는 매일 꿈을 꾼다.




좋은 교사가 될 수 있길. 제발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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