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주는 추억의 무게에 혼자 괴로워했던 적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도 어떤 공간들은 내 지난 시간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와 강한 유대감을 느끼는 매개가 대부분 '공간'이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봄을 지나 여름을 맞는 복학생벤치 주변의 기운이라든가, 학교 앞 술집의 좁은 원형 테이블과 벽의 낙서들, 한숨에 오르기 힘든 언덕의 경사, 시험기간 아주 늦은 새벽의 202 강의실의 차분한 분위기 같은 것들 말이다. 함께 경험하지 않으면 공감을 지어낼 수 없는 것들.
누군가와 그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묘한 안도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추상적인 것이 아닌 아주 구체적이고 소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흥분과 기쁨. 공간이 갖는 힘이다.
오래전 떠났지만 여전히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지나다 곳곳에 묻어 있는 각기 다른 시간 속의 '나'를 만나고 돌아왔다. 종종 낮잠을 자던 잔디밭,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한낮에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던 동네, 잔뜩 취해 누군가에게 전화하던 골목, 매주 가던 술집. 아직 남아 있는 그 공간들과 함께 과거의 내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며 지난날의 나의 흔적과 기억을 부지런히 지워가고 있는데, 내가 묻어 있는 이곳들이 남아 있어 주기만 한다면 나도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낭만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떤 곳을 부러 떠나는 것도, 반대로 절대로 떠나지 못하는 것도, 떠났던 곳에 다시 돌아오는 것도 모두 공간이 주는 의미와 무게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나는 요즘도 가던 곳을 수없이 반복해 간다. 같은 공간의 변화하는 사계절을 기억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계속 바뀌는 여러 시간들 속에서, 그 공간에 여러 날의 나를 묻어두고 돌아온다. 나보다 더 오래 그곳에 남아 있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