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이상한 강박이 있어서였다. 다이어리를 쓰다 잘못 쓰거나 지우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이미 망쳤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더는 쓸 수 없었다. 한 페이지밖에 쓰지 않은 다이어리를 통째로 버리곤 했다. 이후 페이지를 찢어도 쓸 수 있는 만년 다이어리를 사용하며 틀리면 찢어버리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표지의 등 두께를 속지가 메우지 못하게 돼 이마저도 그만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만 보고 나만 쓰는 다이어리인데 망칠 게 뭐고 틀릴 건 또 뭔가 싶지만 그때의 나는 나만 아는 작은 오점들이 못내 불편했던 것 같다.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잘 칠해가던 수채화 위에 검은 물감이 떨어져 흘러버린 것 같은 순간. 후회해봤자 돌이킬 수 없고 다른 색으로 덮어지지도 않는다. 억지로 그 위에 다른 색을 계속 덧칠하면 종이는 찢어질 테고 하는 수 없이 먹칠된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 그 흔적을 마주하는 날이면 후회나 분노, 억울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스크래치를 안고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하게 했고, 제자리에 머물게 했다.
그런 여러 강박으로 점철된 내 인생에 약간의 충격을 준 사진이 하나 있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내 친구 딸의 크리스마스 레고 작품’ 이라고 떠돌던 사진이었다. 여자 아이들의 취향에 맞게 제조된 ‘과일 주스 가게’ 레고 부품들을 가지고 핑크 로봇을 만든 사건(?)이었다. 로봇을 만들라고 들어 있는 조각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봇의 양쪽 팔은 아주 다르게 생겼는데, 그래서 왼팔과 오른팔에 각기 다른 무기를 장착할 수 있었다. 완성도가 높고 엄청 세 보이는 로봇이라 박스에 프린트된 완성품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이 로봇이 돌연변이인 줄 알아채지도 못했다. 이 꼬맹이.. 어떻게 살아도 잘 살 녀석! 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 삶이 주어진 천 피스 조각으로 완성해 나가는 삶이라면 나 같은 인간은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살아갈 거다. 한 피스를 잃어버리면 다 망쳐버리니까. 999 조각을 채우기 전까진 이 엔딩이 '미완성'일 거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둔 순간에 '내 인생은 결국 미완성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레고라면 어떤가. 원래 과일가게를 만들려고 했는데 만들다 보니 완성된 게 로봇이면 어떤가. 로봇을 만들고 있었는데 한 조각을 잃어버려 그 자리에 다른 색의, 다른 크기의 조각을 좀 끼워 넣으면 어떤가. 내가 가진 천 조각 중 백 조각만 골라 쓰면 어떻고, 한 가지 색만 골라 쓰든 뭐 어떤가.
살다 보면 누구나 먹칠 된 그림 앞에 망연자실한 채 서 있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때 다이어리를 버리던 나처럼 ‘이미 망쳤다’고 생각하면 그림은 영영 완성될 수 없다. 박스에 그려진 완성품의 예시 그림은 내 종착지가 아니다. 그건 그냥, 레퍼런스다. 어차피 재료를 선택하는 모든 순간도,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중간에 허물어 버리기를 마음 먹는 것도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게 도통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나의 오늘과 내일을 결정하는 것, 그 정도인데 그 특권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