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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May 14. 2024

님아 정체를 들키지 마오, 낙동강 오리알이 될지니

마피아 보드게임 <레지스탕스 아발론>

보드게임 <레지스탕스 아발론>은 아서왕의 신하들이 되어 성배를 찾기 위한 원정대를 꾸려 나가는 내용의 보드게임이다. 게임 참여자들은 각자의 역할카드를 받고, 돌아가며 원정대장이 되어 믿음직한 사람들로 원정대를 꾸린다. 원정대는 총 5번 출정하고, 이 중 3번의 원정이 성공하면 게임도 성공적으로 끝나게 된다. 단, 내가 파란색 역할 카드를 받은 선량한 아서왕의 신하라면 말이다.

게임의 핵심은 성배 찾기가 아니다. 파란색 역할을 받은 척 하지만 실제론 빨간색 역할 카드를 받은, 숨어 있는 배신자 무리를 찾는 것이 목표다. 원정대를 꾸리는 것은 사실상 배신자를 찾기 위한 명분일 뿐, 선량한 시민인 척하는 악의 세력을 찾아내야 하는 '마피아 게임'이 바로 <레지스탕스 아발론>이다.


게임의 묘미는 플레이어들이 돌아가며 원정대를 꾸리고, 원정대원들이 원정의 성공/실패를 결정하는 동안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투표에 있다. 악의 세력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본인, 또는 같은 악의 세력이 원정대에 포함될 수 있도록 교묘하게 표를 던져 원정을 실패로 만들어야 한다. 게임은 서로가 각자의 정체를 숨긴 채 진행되므로 악은 거짓된 말로 계속해서 선을 현혹하고, 선은 자신만의 논리와 추리로 원정대를 성공시킬 같은 편을 찾아내야 한다. 어느 누구의 말도 쉽게 믿을 수 없다. 거의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근거라면,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동인 투표일 것이다.

물론 파란색 역할카드 중에는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선의 무리를 이끄는 마법사 멀린도 있다. 멀린은 악의 무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쉽게 그 사실을 밝혀선 안된다. 잇따라 원정대가 성공하며 선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 하더라도, 악의 무리가 멀린의 정체를 찾아내어 암살하는 순간 게임은 다시 악의 승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마피아 게임을 처음 해본 것도 아니고, 모든 장르의 게임에 꽤 자신 있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아발론>을 처음 하고선 혼란에 휩싸였다. 함께한 모든 플레이어가 바로 자신이 선량한 시민이라고 외치며 나를 악의 무리로 몰아가는데, 도대체 그 말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그렇다고 나의 주장도 먹히지가 않는다. 심지어 실제로 악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면, 어디서 어떻게 힌트를 얻었는지 귀신같이 내 정체를 알아내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침묵의 아발론도 해봤다. 그러자 이번엔 갑자기 말이 없어진 것을 보니 악이 틀림없다며, 그렇게 정체가 들통나 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 회사의 높으신 분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무방비 상태로 맞이한 1:1 면담 자리에서 그분은 뜬금없이 자신이 나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며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보라고 했다. 의도를 읽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불쑥 회사에 대한 애정도를 묻는 것이었다. 평소 직원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고 업무 외 시간에도 종종 연락하는 등 회사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신 분임을 알고 있었기에 난 참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애정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나 또한 그분만큼의 애정에 동참해야 할 테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일은 일, 나는 나라고 말하는 순간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낙인이 찍힐 것만 같았다.

묘안을 짜냈다. 지금까지 제가 일하는 모습을 봐오지 않으셨습니까, 그저 제 행동을 보고 판단하십시오. 라고 답했다. 회사 밖을 나가는 순간 회사에서의 일은 새카맣게 잊어버리는 나지만, 그래도 사무실에 있는 동안은, 직장인의 탈을 쓰고 있는 동안은 정말 최선을 다해 일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기보단, 직장인으로서 나의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 더 컸다.

그러나 아뿔싸, 높으신 분은 역시 나보다 한 수 높은 곳에 계신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네 행동도 모른다, 네 입으로 대답을 들어야겠다, 고 말하는 것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마법사 멀린인가? 그래서 나의 속마음을 꿰뚫고 확인 사살을 하고 싶은 것일까. 어차피 멀린이라면 거짓말을 한 들 거짓말이 들통날 뿐이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어디 그 말에 책임을 져보거라, 하며 차마 빨간색 카드를 든 채론 받아들이기 힘든 수많은 미션에 참여하게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결국 난 실토하고 말았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파란색 카드는 들고 있지 않습니다. 이걸 확인하시려던 게 맞습니까?


<아발론>의 미덕은 마지막까지 어떤 플레이어도 죽지 않는다는데 있다. 기존의 마피아 게임은 보통 마피아로 지목되거나 마피아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 그대로 게임에서 배제당하여 그 판이 끝날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발론>은 내 정체를 들키건 말건 게임이 끝날 때까지 살아서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참여라고 다 같은 참여는 아니다. 악이라는 정체가 들키고 나면, 더 이상 아무도 나에게 원정대를 맡기지 않는다. 선은 내가 원정대를 실패로 만들 것이란 생각에, 악은 나에게 표를 줌으로써 자신 또한 정체가 들키게 될 것이란 생각에 나를 배제시킨다. 그게 내 정체가 아니라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이미 난 낙동강 오리알 신세. 허망한 외침이 될 뿐이다. 그래도 게임은 끝나고 나면 다음 판이라도 있고, 역할이라도 바꿀 수 있지, 난 어쩌자고 대답만 잘해도 될 자리에서 정체를 실토하고 만 걸까. 앞으로의 원정에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하면 어쩌지, 걱정과 동시에 더 이상은 정체를 들킬까 봐 마음 졸이진 않아도 되겠다는 묘한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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