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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May 14. 2024

소속은 필요하지만 얽매이긴 싫어서

[주간회고] ~5/13

한 자리에 오래 붙어있지 못하는 것도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서라던가, 아무튼 생각해 보면 유난히 그런 걸 잘 못했다. 안정적이고 싶으면서도 안정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불안함이 함께 찾아왔달까. 특히 회사 생활을 하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일이 쉬워지거나 익숙해지면, 또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느껴지면 금방 지루함을 느끼거나 정체되는 기분을 받았다. 그래서 더욱 한 회사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오곤 했다.

그런 면에서 지금 회사는 아주 훌륭한 셈이다. 5년을 넘게 있었으니, 내 인생을 통틀어 초등학교 이후로 가장 오랜 기간 적을 두고 있었던 곳이다. 일이 힘들다, 지겹다, 못해먹겠다, 하면서도 5년을 넘게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역시나 끊임없이 찾아오는 새로운 일 때문이었다. 할 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역설적이게도 내겐 그런 일들이 이 자리를 계속 버티고 서있게 한 힘이 되었다.

 

지금껏 한 회사를 길게 다니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워낙 작은 회사들만 거쳐왔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회사에서 만난 나의 윗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일에 크게 신경 쓰며 나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뭐 이건 작은 회사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대기업이야 말로 라인 타기가 장난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튼, 난 그 또한 견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내 커리어가 연장된다고 느끼는 순간이 늘 제일 불안했다. 저 사람을 벗어나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 앞으로도 내 미래는 계속 저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어야 보장받는다는 건가? 그런 마음이 들 때야 말로, 지겨움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끼며 회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조금 결이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학창 시절에 친구를 사귈 때도 어느 한 명 하고 너무 깊어지는 것 같으면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내 모든 것을 아는 한 명의 친구보다는,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조금씩 다른 내 이야기를 하며 분산을 시켜왔다.

지금도 친구가 많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하는데, 내가 생각할 때 그 비결은 '적당한 거리' 였던 것 같다. 자주 보는 한 두 명보다는 가끔 보는 여러 명이 있어서 그들과 느슨하고 긴 연결을 추구해 왔달까. 물론 시기에 따라 더 자주 보고 더 많은 속 이야기를 나누게 되게 되는 친구들이 있지만, 그러다 또 자연스레 뜸해져도 많은 경우 서로를 서운해하거나 크게 애틋해하지 않고 그저 지금은 그런 시간이려니 하며 넘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듯이, 가끔 이런 나를 못 견뎌하는 사람들도 있어왔다. 아마도 나 역시, 나를 못 견뎌하는 그들을 못 견뎌했을 테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잘 다녔던 회사를 나가게 된 것에 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너무 개인주의적인 것 아니냐고. 주변에 관심도 없냐고. 하지만 늘 깊은 관계와 관심으로 이어져 있어야 공동체적이고 연결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느슨한 관계가 더 큰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빽빽한 나뭇가지를 적당히 잘라 내었을 때 더 멋지고 큰 나무로 자라나듯 말이다.

거리 두기를 하고 나니 더 소중해지는 관계도 있다. 회사 사람들과도 단지 친목만을 위한 식사나 술자리가 싫어서 피해 다니던 나였는데, 이제 곧 끝이라는 생각에 더 그랬는지, 후임이 저녁에 한잔 하자고 다가왔을 때 흔쾌히 받아들이고 내가 앞장서서 집에 가려던 다른 동료까지 꼬셔냈다. 이 모임 외에도 이번주엔 뭔가 사람들을 만날 일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덕분에 퇴사 이후에 대한 실마리도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잡을 수 있었다. 미래를 담보 잡힌 안정이 아닌, 개척의 여지가 있는 불안정 속에서 나는 또 다시 살아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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