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닮은 게임, 보드게임을 소개합니다
“책 제목에는 어지간하면 ‘게임’이란 말을 넣지 말래요. 보통 책 읽는 사람들은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제목의 ‘게임’이란 단어만으로도 걸러질 수 있다는 거죠.”
언젠가 참석했던 북토크에서 들은 말이다. 작가는 처음 자신의 책에 ‘OOO게임’이란 제목을 붙이고 싶었다 했다. 하지만 편집자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북토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 그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왠지 모를 외로움이 밀려와 마음속으로 소심하게 외쳤다. ‘다 그런 건 아니잖아요. 게임도 책도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게임을 좋아한다. 이길 자신과는 별개로 종종 친구들에게 내기를 걸기도 해서 가끔은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소개하곤 한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하면서 했던 가장 큰 플렉스는 닌텐도 스위치와, 스위치 게임을 큰 화면으로 즐기기 위한 49인치 TV를 산 것이었다.
여러 게임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임의 장르를 말해보라면 단연 보드게임이다. 보통 시간이 날 때면 도서관 아니면 보드게임 카페에 가 있는다. 도서관 책장에 빽빽이 꽂혀 있는 책을 보며 어떤 책을 읽을까 둘러볼 때와, 보드게임카페 수납장에 빽빽이 꽂혀 있는 게임을 보며 오늘은 어떤 게임을 해볼까 고민할 때만큼 즐거운 시간이 또 없다.
다른 게임보다도 보드게임이 좋은 이유는 뭘까, 생각하다 보면 그날의 북토크가 또 떠오른다. 사실은 그런 것 아닐까. 보드게임은 게임 중에서 가장 책을 닮아 있다. 얼마 전 토스의 유튜브 머니그라피의 ‘B주류경제학’ 코너에 올라온 보드게임 산업 편을 봤다. 해당 편의 타이틀은 “출판사보다 더 아날로그인 산업이 있다? 낭만 그 자체인 보드게임 씬 이야기”. 생각할수록 이만큼 선명한 소개가 또 있을까 싶다. B주류경제학에서 나온 말대로 보드게임과 출판 시장은 닮은 구석이 꽤 많다. 보드게임을 만드는 사람의 호칭은 ‘작가’고, 보드게임을 찍어내는 과정은 ‘출판’이라 말한다. 보드게임 회사를 출판사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볼수록 닮은 점이 많은 책과 보드게임, 그래도 그중에 한 가지만 꼽아보라면 망설임 없이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입문전략 보드게임으로 잘 알려진 <스플렌더>는 르네상스 시대의 보석상이 되어 승점을 모으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은 돌아가며 보석 토큰을 모으고, 모은 토큰으로 카드를 산다. 카드는 플레이어에게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석과 승점을 주기 때문에, 얼마나 전략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카드를 빨리 모으느냐가 게임의 승패를 좌우한다.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라던가 보석상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는 그냥 가벼운 배경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막판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추가 승점 타일에 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결국 귀족에게 잘 보이는 상인이 더 많은 승점을 얻어 우승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동물원을 건설하는 타이쿤 류의 보드게임 <아크노바>도 게임의 배경과 플레이가 절묘하게 잘 어우러진, 좋은 이야기를 가진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동물원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이 게임을 하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먼저 플레이어들은 동물원 공터가 그려진 개인 보드판을 나눠 받는다. 이후 행동 카드를 통해 동물 우리를 짓거나, 빈 우리에 동물을 넣거나, 후원자를 얻거나, 협회에 들어가 다양한 대외 활동을 벌일 수 있다. <아크노바>를 몇 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동물원 운영에서 고려해야 할 점 같은 걸 생각해 보게 된다. 동물을 많이 모아 매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돌본 동물을 다시 야생에 풀어주거나 기부금을 내는 행동 등으로 보호 점수를 올리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게임의 승리를 위해서다. 공동 보드판의 서로 다른 끝에서 시작하는 매력 점수와 보호 점수는 나란히 놓인 트랙을 따라 서로를 향해 달려오는데, 한 명이라도 두 점수 말의 위치가 같아지는 순간 게임의 종료 조건이 성립된다. 최종 우승은 매력 점수와 보호 점수가 겹치는 구간이 가장 많은 플레이어에게로 돌아간다.
아크노바를 유통하는 코리아보드게임즈의 소개에 따르면 <아크노바>를 만든 마티아스 비게 작가는 실제로 자기 고향의 동물원을 후원하고 있을 정도로 동물원이라는 테마에 애정이 많다고 한다. 보면 볼수록 한 편의 소설을 써 내려가는 것 못지 않게 많은 조사와 연구를 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아크노바>를 할 때면, 이번엔 영장류가 모인 동물원을 만들어봐야지, 이번엔 코끼리나 호랑이 같은 대형동물이 넓은 우리에서 편안히 머물다 야생으로 돌아가는 동물원을 만들어봐야지, 같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물론 이 또한 내 손에 들어온 카드를 보면서 짜는 전략적 선택이지만, 그 안에서 이리도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볼 수 있다니 가끔은 우승을 못해도 만족스러워지곤 한다.
한적한 시골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게임, 바닷가 항구 도시에서 교역을 하는 게임, 와인 농장을 운영하며 최고의 와인을 생산하는 게임, 미지의 땅을 돌아다니며 숨어있는 유적을 발굴하는 게임 등 보드게임에는 다 적을 수 없이 다양한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때로는 세계대전을 재현해 놓은 게임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도 있다.
물론 보드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배경 설정은 부차적인 것이고, 게임의 진행 방식이나 시스템을 더 고려한다는 사람들이 더욱 많을 것이다. 하지만 보드게임을 할수록, 이러한 배경 설정이나 이야기가 더욱 치밀한 게임의 룰이나 규칙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게임을 한 판 하고 나면, 동물원 운영이나 우주 개발처럼 이전까지 내가 잘 몰랐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간 느낌이 들기도 한다.
책이 글을 읽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나를 다른 세계에 데려가 준다면, 보드게임은 내가 직접 그 세계에 들어가 움직여보는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다. 물론 그 세계는 현실보다 한참 단순해진 형태로 테이블 위로 축소 된 세상이지만, 직접 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강력한 몰입의 순간들을 선사한다. 새로운 세계가 궁금할 때, 가끔은 어떤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골치 아픈 현실의 문제를 잠시 잊고 싶을 때 종종 보드게임을 꺼낸다. 마치 책과 같은, 가끔은 책 보다 더 재미있는 매력적인 이야기와 어드벤처의 세계가 그곳에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