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드라마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밤이 지나갔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느라 새벽까지 잠을 못 이뤘다. 그러나 사태를 예견이라도 한 듯 발빠르게 움직인 다수 덕분에 그나마 상황이 빨리 종료된 느낌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날의 감춰진 이야기들이 나올 수록 어이가 없고 화가 나지만) 당시에는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가 되어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어쩜 이렇게 허술한 전략을 짰지? 하물며 내가 게임할 때도 이 정도로 대책 없는 수는 두지 않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일이 뭐든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너무 심했다.
보통 게임을 할 때도 이 정도의 돌발행동이 나오는 경우라면 거의 두 가지 중 하나다. 먼저, 믿는 구석이 있는 경우.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남몰래 빌드업해 놓은 상상도 못 할 다음 패가 있다거나, 또는 비밀스럽게 이미 내 편이 되어 줄 연합을 꾸려놓았거나. 대체로 뛰어난 전략가나 협상가들이 이런 플레이를 펼치곤 한다.
<데블스플랜>이나 <피의 게임>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보고 있으면 한 번씩 플레이어가 이해 못 할 행동을 하는데 알고 보면 이미 다른 참가자 중 누군가와 물밑 작업을 마쳐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잠깐 빌런이 되더라도 다 그만한 이유가 숨어있더라. 그런데 연합이라도 그 면면을 잘 보아야 한다. 대체로 이럴 때의 조력자는 누가 뭐래도 인정할만한, 그 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을 섭외해 놨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수가 많거나. ‘대세’를 만들기에 우리 편이 많은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전략가도 협상가도 아니면서 갑작스런 패를 던지고 마는 또 다른 경우는 무얼까? 위의 경우가 아니라면 이게 거의 100%라고 보는데, 바로 생각을 깊이 안 해서다. 애초에 룰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거나, 돌아가는 판을 제대로 읽고 있지 못하거나. 자기 수준으론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게임에 껴서 눈치껏 배우며 따라가도 벅찰 상황에 자기 마음대로 휘둘러 보겠다고 이 패, 저 패 순서도 전략도 없이 내다간 망하기 십상이다. 이런 플레이어는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눈치코치 없이 날뛰다 자기 플레이만 망치는 게 아니라, 자칫 그 게임판을 통째로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플레이 타임이 긴 전략게임을 할수록 고민이 깊어진다. 내가 가려던 길, 하려던 행동이 다른 플레이어의 선점으로 다 막히고, 초반에 우왕좌왕하느라 기반을 닦아놓지 못했어도,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도저히 뚫고 나갈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에라 모르겠다며 폭탄을 던져버리는 플레이어는 없다. 그래도 그 판이 끝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생각해야 한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하고 고민하며 일을 되게 만들어 봐야 한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우리는 바로 그걸 해보자고 모인 거니까. 그게 바로 플레이어들 사이의 약속이니까.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해볼 일이 좀처럼 없었는데, 새삼스럽게 누구와 함께 플레이하느냐도 참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 어제 지인이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좋은 사람들과 재미없는 게임하기 vs 별로인 사람들과 재밌는 게임하기" 나는 망설임도 없이 전자를 골랐다.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하는데 재미없는 게임이란 없다. 별로인 사람들과 함께 하면 재미있는 게임도 엉망이 된다. 어제 대답할 땐 별생각 없이 한 이야기였는데 바로 이렇게 와닿는 이야기가 될 줄이야. 아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계속 보고 있자니, 아무튼 그렇게까지 망한 게임은 또 아닌 것 같다. 판을 지켜보고 있을 외부인들에겐 좀 많이 부끄러운 상황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그래도 생각지 못한 어떤 기회가 되어주는 것 같아서. 광장에 나와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 보여서. 그냥 자폭의 한 수였다고 생각해 보련다. 이제부터 우리들의 플레이가 더욱 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