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금요일은 <피의 게임>을 보는 날이다. 최근 wavve에서 시즌3가 방영을 시작했다. 출연자가 더 많아지고 대결 구도도 세 팀으로 나눠지며 전보다 조금 산만해진 전개가 아쉬운데, 그보다는 뭐랄까, 훨씬 난폭해진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자꾸만 보다가 멈칫하게 된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 더 범위를 좁혀보자면, 머리가 좋거나 신체조건이 뛰어난 참가자들이 모여서 게임을 치르고 그 안에서 승리자와 패배자를 나누어 살아남는 방식의 서바이벌을 안 좋아한다. 딱 <피의 게임> 같은 서바이벌. (<스우파>나 <사이렌> 같은 서바이벌은 완전 몰입해서 봤다) 처음부터 안 좋아했던 건 아니다. <피의 게임>도 1, 2편을 꽤나 챙겨서 봤고, 이런 장르 프로그램의 포문을 연 <더 지니어스> 시리즈도 꽤 재밌게 봤다. 언제부터 이런 프로그램을 보는 게 불편해졌더라. 여전히 문제를 풀고 처음 보는 종류의 게임의 필승 전략을 찾아가며 승리에 다가서는 모습은 재미있는데, 내가 잘 못 보겠는 건 말하자면 플레이어들 간의 소위 정치질이다. 어쩐지 새 프로그램이 나올수록 플레이어들의 정치질도 고도화된다. 얼마 전 한 지인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실제 우리 삶은 그렇지 않은 데 경쟁과 승리만이 전부인 것처럼 다루는 세계가 보기 불편해."
정말 맞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프로그램 속 플레이어 대다수가 나와 내 팀이 아닌 플레이어를 전부 적으로 간주하며 욕하고 이간질하고 승리에 집착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자기만의 플레이를 해보려는 참가자도 있지만 이들은 말하자면 입김 센 사람의 정치질에 의해 일찍 탈락해버리고 만다. 언제부턴가 두뇌게임 서바이벌에 이간질과 정치질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는지. 물론 게임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모략과 협상력은 필요하다. 상대를 잘 꼬셔서 나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건 정말 중요하고 훌륭한 능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편이 아닌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을 말로 다루는 건 좀 다른 이야기다. 지금 보고 있는 <피의 게임>에서도 자신의 편이 아닌 상대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드는 몇몇 참가자의 태도가 피의 게임 특유의 폭력성 보다 더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재밌게 챙겨보기 시작했던 건, 프로그램 속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메인 경기가 보드게임류였기 때문이다. 가끔 아는 게임이 나오기도 하고, 가끔은 아 이 게임을 이렇게 변형시켰나? 저 게임에서 힌트를 얻은 걸까? 싶은 게임들이 나오기도 했다. 출연자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특히 <더 지니어스> 홍진호의 연맹 없이도 빛나던 천재 플레이와 최근 <데블스 플랜> 하석진과 이시원의 콤비 플레이는 진짜 몇 번을 복기해 봐도 훌륭한 장면이다. 주어진 문제에 완전히 집중하고 몰입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그야말로 최고의 두뇌 플레이였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니 최근 제일 재밌게 봤던 서바이벌은, 게임의 승리가 정말 우리 세상의 전부냐고 반문하는 듯했던 tvN의 <소사이어티 게임>과, <소사이어티 게임>을 연출한 정종연 PD의 최신작으로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데블스 플랜>이었다.
<소사이어티 게임>은 얼핏, 여타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처럼 게임의 승리를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진짜로 그게 전부일까? 애초부터 한 마을의 구성원으로 뭉친 참가자들은 게임의 승리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를 의심하기도 이간질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울고 웃는 우리 편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름부터 괜히 '소사이어티' 게임이 아니었던 거다.
<데블스 플랜>에서는 참가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떨어뜨리지 않는 플레이가 가능했다. 실제로 그걸 위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내용이 꽤 비중을 차지했고. 살짝 팀이 나뉘긴 했지만, 그 사이의 갈등은 사람 사이의 편 가르기가 아닌 서로가 생각하는 전략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결국 플레이어들은 이간질과 모략이 아닌, 그야말로 전략과 두뇌 싸움으로 최종 승리를 향해 가는 길을 만들어 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놀이가 중요하다고 한다. 재미도 있지만, 놀이를 통해서 규범을 지키는 방법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즉 협동심도 기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만이 아니다. 내가 즐기는 많은 보드게임들이 그렇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 한 테이블에 앉아 같은 게임을 하는 우리. 게임을 하는 동안 우리는 싸우기보단 상호작용을 한다. 각자가 서로의 변수가 되어 게임을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만든다. 때로 편 먹기도 하고 골탕을 먹이기도 하지만 그 또한 전략의 일부일 뿐이다.
최근에는 협력게임도 많이 한다. 플레이어가 모두 한 팀이 되어 게임이 만들어놓은 제약을 뚫거나,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미션을 성공하여 다 함께 승리하는 게임이다. 생각해 보면 난, 보통 승리는 운 좋았을 때 따라오는 부산물 같은 것이었고 그냥 사람들과 모여 앉아 머리를 굴리는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아 그런데 또 잘 모르겠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엄청난 금액의 우승 상금이 붙는다면 마음이 달라지려나. 그래도 대부분 서바이벌 참가자들이 탈락하고 눈물 흘리는 이유는 상금이나 우승이 아닌 사람 때문이었던 걸 생각하면, 음 난 여전할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