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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Dec 27. 2024

일꾼을 놓을래, 일꾼이 될래

보드게임 <다윈의 여정>

한동안 뜸하던 보드게임의 세계에 다시 빠져든 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절정을 향해가던 시기였다. 사무실에서는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퇴근한 뒤에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습관적으로 핸드폰이나 회사 메일함을 확인하곤 했다. 대부분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위에서 결정된 일을 열심히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 일들이 나를 늘 힘들게 만들었다. 퇴근 후에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업무 생각에 괴로울 때면 저녁도 안 먹고 보드게임 카페로 달려갔다.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상대에 집중하다 보면 핸드폰을 보는 것도 잊었고, 당장 다음 수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눈앞에 보이지 않는 업무를 위한 머릿속 공간을 남겨 놓을 틈이 없었다.


그 무렵 내가 새로 배웠던 보드게임 중 하나가 <다윈의 여정>이다. 제목의 다윈은 우리가 잘 아는 <종의 기원>의 저자, 바로 그 찰스 다윈이다.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 진화론을 발전시킨 찰스 다윈은 어려서부터 식물이나 조개, 광물 등을 수집하며 다니고, 커서는 세계를 일주하며 다양한 지질 정보와 생물종을 연구했다. 보드게임 <다윈의 여정>은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를 탐험하며 진화론을 발전시킨 그 여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다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또다시 바다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표본을 수집하고, 이를 전시하고, 조력자를 확보해 나가며 성공적인 여정을 마쳐야 한다.


사실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려나 싶어 처음 이 게임을 시작했는데, 플레이 방식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여행이나 탐험은커녕 게임 내내 머리를 하도 굴려서 쥐가 날 정도다. 이 게임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보드게임의 다양한 플레이 방식 중 ‘일꾼 놓기’라는 메커니즘을 알고 있으면 좋다. 일꾼 놓기란, 플레이어에게 행동 기회를 의미하는 일꾼 말 여러 개를 제공하고, 이것을 돌아가며 원하는 행동 칸에 놓으며 진행하는 게임 규칙을 뜻한다. (이 설명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고했다.) 전략 게임 위주의 보드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종종 플레이 방식에 따라 보드게임의 스타일을 구분하곤 하는데, 일꾼 놓기도 그중 한 가지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일꾼 놓기 게임 중엔 <다윈>보다 훨씬 간단하고 쉬운 게임들도 많다.) 그런데 일꾼 놓기가 게임 메커니즘으로까지 이렇게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을 부리는 건 매우 유구한 역사이구나.


<다윈의 여정>은 시작할 때 3개의 말이 주어진다. 플레이어들은 돌아가며 자기 말을 원하는 행동 칸에 놓는다. 말을 어디로 보내느냐에 따라 바닷길을 탐험할 수도, 육지를 탐험할 수도, 때로는 새로운 미션을 부여받거나 고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도 부칠 수 있다. 그런데 일꾼을 놓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각 행동 칸에 들어가기 위해선 특정 인장이 필요한데, 일꾼마다 가지고 있는 인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행동 칸 중에는 한 플레이어의 일꾼이 선점하고 나면 다른 일꾼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도 있다.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게임을 하는 내내 어떤 일꾼을 어떤 순서로, 어느 자리에 보내야 할지 치열한 내적 갈등을 벌이게 된다.


한참 일꾼 놓기 게임에 빠져들었던 건, 현실에서 누군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일꾼이 된 내 신세를 게임하는 동안만이라도 역전시키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역시나, 일꾼이 되는 것만큼이나 일꾼을 부리는 일도 쉽진 않았다. 가끔은 너무 많은 선택지 때문에, 가끔은 수많은 선택지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보낼 수 없는 내 일꾼들 때문에 눈앞이 막막해지곤 했으니까.


적재적소에 잘 들어간 일꾼은 자신의 역할을 200% 해내며 여러 가지 콤보 효과를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이 <다윈의 여정>의 매력포인트로 꼽는 부분도 바로 연쇄작용으로 인한 콤보 플레이다. 이렇게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선 일꾼의 능력만큼이나 일꾼을 부리는 사람의 타이밍을 보는 능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계산력이 중요하다. 지금 이 타이밍에 이 일을 하는 게 맞을까? 일꾼을 저기로 보내서 이런 효과를 얻는 게 맞을까? 일꾼이 아닌 주인이 된 나는 회사에서보다 한층 집중하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난 아직 일꾼 놓기류의 게임은 잘 못한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선택지 중 최선의 선택지를 찾아내는 게 어렵고, 무엇보다 한창 벌려놓은 내 판을 보기에도 바빠 상대의 수를 미리 따져보지 못한다. 남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보다 아직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기에도 벅차다. 어쩌면 그냥 나에게만 집중하는 게 더 편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다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안 그랬으면 창조론이 대세였던 그 시대에 용감하게 진화론을 꺼내들 생각을 과연 할 수 있었을까. 결국 그 발표가 이렇게 오랜 시간 인류에 자기 이름을 남기게 될 줄은 예상이나 했을까. 심지어 그의 삶은 게임으로까지 다시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다윈의 여정> 작가를 만나면 이걸 꼭 물어보고 싶었다. "다윈의 생을 보다가 이 게임을 만들게 되었나요, 아니면 게임의 메커니즘을 먼저 생각한 끝에 다윈의 스토리를 입히게 된 건가요?" 적어놓고 보니 어쩌면 이건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같은 질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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