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테라포밍 마스>
친구들을 만나면 늘 바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한동안 나는 젤 바쁜 쪽에 속했는데 요즘은 후자 쪽이다. 아마 퇴사의 여파인지도 모른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사무실을 나와서 보니 나는 어쩜 이리도 여유로운 존재인지. 이제 와서야 나의 업에 대한 고민까지 깊어지면서 당분간은 '안 바쁜 날'들이 조금 더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친구는 오늘도 모임에 늦게 왔다. 오전에 예정된 다른 일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매일 뭐가 그렇게 바쁘냐는 다른 친구의 타박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뒤늦게 진로를 바꿨으니 대학원이라도 가야 했고, 석사를 따고 보니 박사도 준비해야겠고, 공부만 할 수 없으니 연구실 들어가고, 연구실 들어가니 해야 할 일이 늘어나고..." 비단 일 뿐만은 아닐 거다. 친구는 일 외에도 오랫동안 교회학교 선생님과 봉사활동 같은 일들을 해오고 있었다. 하나씩 하던 일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젠 멈출 수 없이 뭔가가 계속 돌아가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거 참, 엔진을 잘 쌓았군. 친구의 이야길 들으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계속 돌아가는 삶이라는 말에 얼마 전 설명을 들은 '엔진빌딩' 게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엔진'을 '빌딩'하는 게임. 나의 앞선 플레이가 이후 플레이에 영향을 주어 조금씩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플레이 종류라고 설명할 수 있으려나. 엔진빌딩에 대한 설명과 함께 그날 내가 배운 게임은 <테라포밍 마스> 였다.
<테라포밍 마스>는 화성을 개척해 나가는 보드게임이다. 2016년 발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지금도 많은 보드게이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흥미로운 배경 설정과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어렵지 않은 플레이 방식으로 초보 게이머들도 도전해 볼만한 전략 게임이다. 게임의 배경은 2315년. 지구는 자원 고갈,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이곳에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세계정부는 화성으로 눈을 돌린다. 그리하여 전 지구로부터 걷어낸 세금을 쏟아부어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는 대규모 정부 지원 사업 '테라포밍 마스'가 시작된다.
플레이어는 화성 개척에 나선 기업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다양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 카드를 사서 기업을 발전시키고, 생산량을 늘려가며, 화성을 테라포밍 해야 한다. 이때 손에 들어오는 기업 및 프로젝트 카드를 얼마나 전략적으로 잘 운용하느냐가 게임의 성패를 가른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기업부터 보자. 기업들은 저마다 다른 다채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화성에 숲을 조성하는데 특화된 능력을 가진 기업, 화성의 온도를 높일 수 있는 열 생산에 특화된 기업, 전 우주적인 이벤트에 영향을 미치는 우주형 기업, 기술 개발을 앞당길 수 있는 연구에 특화된 기업 등. 기업의 특징마다 보유하는 태그가 다르고 이후 카드 플레이에 미치는 영향력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한 기업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프로젝트 카드는 각 플레이어들이 기업을 운영하는 과정이자, 실질적으로 이 게임을 플레이해 나가는 메인 요소다. 프로젝트 카드는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끝인 경우도 있지만, 세대(라운드)를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효과를 미치거나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카드도 있다. 예를 들어 특정 형태의 건물을 지을 때 가격을 깎아 준다거나, 누군가 화성을 개척할 때 나도 혜택을 받게 된다거나, 똑같은 태그가 붙은 카드를 사용할 때마다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거나, 등등.
카드가 주는 영향력이나 효과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게임의 초반에 사용하는 게 유리한 카드도, 아껴 놓았다 후반에 사용하는 게 유리한 카드도 있다. 또 어떤 카드는 사용하기 위해선 특정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하기 있기 때문에, 쓰고 싶어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도 한다. 아 물론, 기업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면 단지 생산력이 달려서 카드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아무튼 전략을 잘 짜서 플레이를 한다면 조금씩 효과에 효과가 증폭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미 내려놓은 카드의 효과로 이후 내려놓는 카드의 비용을 할인받고, 그래서 내려놓은 카드의 효과로 또 다른 이득을 받고, 그런데 마침 그 두장의 카드 태그가 같아서 또 내려놓을 수 있는 다른 카드가 생기고, 그렇게 내려놓은 카드로 승점을 미리 챙기고. 활동형 카드가 많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모든 행동을 마친 후에도 혼자서 계속 바쁘게 이 행동, 저 행동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같은 세대(라운드)를 지나면서 누구는 두세 번 만에 할 일이 없어지는 반면, 누구는 다섯, 여섯 번이 넘도록 플레이할 거리가 넘쳐나기도 한다.
엔진빌딩류의 게임을 잘하기 위해선 초반에 노선을 잘 잡고 전략을 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연구 기업을 선택해서 계속 연구 쪽으로 파고 들어갈 것인지, 초반 생산력이 빵빵한 기업을 선택해서 끝까지 물량으로 밀어붙이며 적극적인 개척 플레이에 나설 것인지, 남들이 잘 공략하지 않는 타 행성(목성이나 금성) 개발에 유리한 카드를 노리는 나만의 루트를 뚫을 것인지 등.
이는 보통 처음 이 게임을 배우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선택한 기업과 내가 사용하려는 프로젝트 카드가 따로 노는 상황. 돈은 돈대로 쓰고, 생산력은 생산력대로 놓치면서, 뭔가 쌓이는 것도 없이 계속 앞선 라운드와 큰 연관성이 없는 플레이가 이어진다. 심지어 특정 태그를 확보하는 것도 잘 안 돼서, 좋은 카드가 손에 들어왔을 때도 사용 가능 조건이 충족 안되어 버려야만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더구나 카드가 들어오는 방식이 랜덤이고 또 드래프트(플레이어 간의 교환)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인 계획대로 원하는 카드를 손에 잡을 일은 정말로 운애 맡겨야 한다.
심지어 계획을 잘 세우더라도 다른 플레이어와 전략이 겹치면 극심한 경쟁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치밀한 전략과 운빨로 서서히 상대를 제압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빠르게 노선을 돌려 다른 방향을 공략할 것인지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야 보너스 승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업적상이나 기업상까지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의 경우엔 판단을 꽤 잘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모두 다 비슷한 시기에 진로를 바꿨다. 둘 다 이미 확보한 태그를 적당히 활용할 수 있는 (하지만 서로 다른) 분야로 옮겼는데, 친구는 나보다 전략을 더 치밀하게 짰던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친구가 또 말한다. "아니야, 그냥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이제 와서 안 맞는다고 또 어떻게 바꿔? 결정했으니 그냥 밀고 나가야지."
맞는 말이네.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는데. 벌써 모두가 열심히 자기의 방식대로 개척에 나서고 있는데. 나만 혼자 이게 맞나, 저게 맞나, 기다리다 보면 이거보다 더 좋은 카드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며 망설일 시간이 어디 있나.
내 인생은 가끔 그래서 게임이 부럽다. 뒤늦게 깨닫더라도 한판 더, 한판 더, 익숙해질 때까지 다시 해볼 수가 있으니까. 다행히 앤딩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 듯하다. 모아놓은 내 태그도, 카드도 나쁘지 않고. 다만 애초에 나라는 기업에 대한 특성 파악이 부족했다. 분명 초반부터 더 잘 굴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후회하면 뭐 하나, 벌써 이만큼 와버린걸. 이제부터라도 길 잃은 엔진빌딩 다시 구축에 나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