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략집 없는 인생

by 배짱없는 베짱이

“인생도 게임처럼 공략집이 있으면 좋겠다.” 대학생 시절이던가, 일기장에 이런 글을 적어 내려간 적이 있다. 이 길은 아무래도 답이 아닌 것 같은데, 잘못된 길로 가다가 그대로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인생은 게임과 달라서 생명을 몇 개씩 주지도 않는데, 한번 떨어지면 다시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은데, 따위의 우울한 말들을 잔뜩 적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 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고집이 있었지만 주변 사람의 눈치도 많이 봐서 뭘 하나 할 때도 내가 틀린 것은 아닌지,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하고 다녔다. 어떤 선택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겠다며 고민만 길게 하다가 아예 선택할 기회조차 놓쳐버린 적도 많다. 물불 안 보고 달려들 정도로 좋아하는 게 없었던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제야 돌아보면, 공략집이 있었던들 잘 쫓아나 갔으려나 싶은 소심한 날들이었다.


사실 공략집 유무와 상관없이, 나에게 중요했던 건 실패하지 않는 일이었다. 지난한 나의 게임의 역사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내가 본격적으로 게임에 빠져든 건 초, 중학교 시절. 그때 처음으로 집에 컴퓨터가 들어왔다. 아직 윈도우가 깔려 있지 않은 컴퓨터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검은색 플로피 디스크를 넣고 도스에 명령어를 입력하면 엉성한 도트 이미지로 만들어진 게임 화면이 시작됐다. 그 시절 나를 사로잡은 게임은 <너구리>와 <고인돌>. 둘 다 이미 만들어진 게임 속 루트를 따라 장애물은 피하고 점수를 얻으면서 단계를 깨나가는 액션플랫포머 타입의 게임이었다. 스테이지가 꽤나 길고, 시간이 지날수록 난이도도 높아져 보통 생명도 3개 정도씩 가지고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나의 자랑은 한 번도 죽지 않고 스테이지를 완료하여 앤딩을 보는 일이었다. 가끔 어이없는 곳에서 실수해 생명이 깎이면 그게 싫어서 아예 껐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던 적도 있다. 한 번이라도 틀리면, 한번 실수해 버리면 인생이 아작 날지도 모른단 걱정을 그때부터 무의식 중에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듦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변화인 걸까, 어느새 나는 삶에서도 게임에서도 조금 더 유해진 사람이 됐다. 죽거나 깨지는 걸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솔직하게는 아직도 엄청 두려운 데 ‘어쩌겠어’라는 생각으로 그냥 부딪쳐본다. 어차피 소심한 사람이라 그런다고 크게 망하지도 못하는 나를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변한 데는 보드게임의 영향도 있다. 보드게임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진행하는 게임이다 보니 일단 게임판을 펼치고 나면 좀처럼 도망갈 틈이 없다. 그런데다 끊임없이 내 턴이 돌아오기 때문에 멈출 수 없이 계속선택을 하고 결정을 해나가야 한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끊임없이 지금 이 상황에 집중하며 다시 살아날 궁리를 하는 거다. 망했어도 망한 티를 내지 않고 앞서가는 사람을 쫓아가며 전략 수정에 나서는 거다.


요즘 들어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좀 더 죽어봤어야 하는데. 실수했어도 꺼버리지 말고 계속해봤어야 하는데. 수습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 다 만들어놓은 판이 아니고서야 실패하지 않는 공략집 따위가 있을리가 없을 텐데. 그리고 이건 신기하게도 요즘 가장 자주 듣는 이야기기도 하다. ‘전략수정’. 계속 수정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유행하던 말마따나 꺾여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 판 위에 있는 동안은 내 맘대로 접을 수도 없고, 내가 준비를 다 마칠 때까지 누군가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내는 것만 아니라, 못하면 못하는 대로 상황을 깨닫고 거기서부터 다시 전략을 세워 끊임없이 해보는 과정도 재미라는 걸 이제야 조금씩 느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요즘 함께 보드게임을 하는 사람 중엔 자기는 인생보다 게임에서의 실수가 더 뼈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은 기니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수습해 나갈 수라도 있는데, 보드게임은 매 턴이 중요해서 한 번 실수하면 그대로 승리를 빼앗기기 쉽다고 말이다. 게임은 다시 하면 되잖아요? 라는 내 말에, 그래도 지난 게임의 결과가 달라지진 않잖아요,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게 바로 승부사적 기질인 걸까. 그런데 요즘 저 말이 내게 참 새롭게 다가온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알 것 같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지금부터라도 수습할 일을 많이 만들어보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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