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짱없는 베짱이 Jan 05. 2019

43. 진짜 적도를 찾아서

2017.7.23. 키토, 에콰도르(D +167)

이름부터가 '적도'인 나라 에콰도르(Equador)의 수도 키토(Quito)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적도가 지나가는 도시다. 그런데 키토에는 무려 2개의 적도가 있다. 1735년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에콰도르에 와서 적도를 발견하고 그 성과를 기념하기 위한 적도 기념탑을 세웠으니 이것이 하나다. 또 하나는 옛날부터 이 땅에 살던 인디오들이 '인티 난(Inti nan, 태양의 길)'이라 부르던 곳으로 프랑스인들이 세운 기념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물론 둘 중 하나만이 정확한 적도다. 싱크대에 담긴 물이 소용돌이 없이 그대로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곳, 바로 인디오의 적도다.




"적도가 두 개? 남미 진짜 너무한다, 아무리 사기가 많다지만 어떻게 적도까지 가짜로 만드냐. 우리는 진짜 적도만 가자. 절대 속지 말자! 아저씨, vamos a Mitad del mundo(적도로 갑시다)!"

저 말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가짜 적도(?)는 사실 남미 사람들이 사기 치려 만든 게 아니라 18세기에 이 땅을 탐험하러 온 외지 사람들이 잘못 찾아낸 것이다. (이것을 상업화한 것은 또 별개의 문제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 Mitad del mundo(미타드 델 문도), 그러니까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 표현은 적도이긴 한데 사실상 우리가 가지 말자던 그 가짜 적도를 부르는 말이었다.


마치 유원지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던 가짜 적도(?)의 적도 기념탑.

Ciudad de mitad del mundo. 일명 적도 기념탑. 표를 사는 순간 아차, 당했다 싶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것 두 군데를 다 보고 가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커다란 탑도 있겠다, 사람도 많고 유원지처럼 잘 꾸며놓은 공원을 돌아보니 적도에 왔다는 인증샷을 남기기엔 이곳이 더 적당할 것 같기도 하다. 그늘 하나 없이 휑한 도로, 머리 위로는 뜨겁게 이글거리는 태양, 어쨌든 적도 쯔음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키토 시 북쪽 약 22km 지점에 있다는 이 기념탑은 지구의 지형을 연구하기 위해 에콰도르에 온 프랑스 측지단의 적도 발견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30m 높이의 피라미드형 기념탑은 과거 인디오들의 축조물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고. 탑 주변으로는 큼지막한 방위 표시와 함께 그 유명한 '못 위에 계란 올리기' 체험장이 있다. 사실상 적도선에서 벗어난 곳이니 이곳에서 계란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성공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라 괜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맴돌았다. 일행 중에 I가 계란을 세우는 데 성공했고, 우리 모두 자기가 세운 양 그 옆에서 기념 사진을 찍으며 신이 났다.

기념탑 안은 인디오 박물관, 기념탑 주위에는 키토 시를 모형으로 만든 것과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는 천문대 등이 있어 나름 볼거리가 많긴 하다. 식당에 맛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비싸기까지 한 메뉴들을 보면서 역시나 에버랜드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버리진 못했지만 말이다.



태양박물관은 인디오 역사 박물관이기도 하다. 진짜 적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출구를 나와 잘 정비되지 않은 도로를 따라 5~10분 정도 걸으면 진짜 적도가 있다는 태양박물관(Museo Solar Inti nan)에 도착한다. 무성한 풀 숲 사이로 마치 숨겨 놓은 듯 한 입구는 한 번에 찾아오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렇게 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다. (알고 보니 이곳이 후문이라 더 그랬다.)

인디오들이 신전을 짓고 신성시하던 이곳이 진짜 적도로 밝혀진 것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다. 인공위성과 GPS를 이용해 정확한 수치를 측정한 결과 그전까지 적도로 여겨졌던 기념탑에서 200m 정도 떨어진 이곳이 진짜 적도였음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보다 토속적인 분위기의 적도선 위에서 각종 적도 체험을 해볼 수 있다.


GPS가 00.00.00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적도. 북반구와 남반구를 정확히 나누는 이 곳에서는 두 힘이 충돌하여 무력화되는 적도 현상이 일어난다. 바람이 불지 않는 무풍지대가 형성되고, 물이 수챗구멍에서 빠져나갈 때 소용돌이가 생기지 않는다.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마치 인디오의 토속 마을처럼 꾸며놓은 듯한 박물관을 한 바퀴 돌다보면 마지막 순서로 이 적도선에 도착해 적도 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

눈을 감고 적도선 위를 똑바로 걸어보기도 하고(적도 현상으로 인해 눈을 감고 걸어도 흔들리거나 휘어지지 않고 앞으로만 곧장 걷게 된다고 한다), 적도선의 남쪽 그리고 북쪽 그리고 정 가운데서 실제로 싱크대의 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관찰한다. 못 위에 계란 올리기는 역시나 가장 인기 체험. 심지어 올리는 데에 성공하면 에그 마스터라는 수료증까지 받을 수 있다. 이번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성공률. 아까 적도 기념탑에서 한참을 실패한 덕에 이 성공이 더 신기하기만 하다.

전체적인 꾸밈새도 그렇고 체험도 그렇고 솔직히 말해서 이곳에 먼저 왔다면 굳이 기념탑은 구경하지 않았을 거다. 입구를 찾기 어려웠던 것과 별개로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손님이 많았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와서 보기에도 정말 딱 좋아 보였다.  




마추픽추와 이과수 폭포에서처럼 이곳에도 기념 스탬프가 준비되어 있다. 중남미 여행을 하면서 어느새 여권의 반을 다 썼다. 00.00.00이라는 표시가 되어있는 이 적도 도장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런 기념 도장은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게, 간혹 여권 훼손으로 간주되어 다른 나라를 출입할 때 거부 사유가 될 수 있단다. 여하튼 그때는 그런 것도 모르고 마냥 좋았다.  

남반구고 북반구고 위도고 적도고 그런 건 다 지리책에서만 잠자고 있는 재미없는 이야긴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그 적도선에 위에 섰다. 소소하게 신기한 체험들도 해보고, 그리고 이제는 더 북쪽으로, 다시 적도와 멀어져 북쪽으로 올라갈 시간이다.

아 이건 여담인데, 역시나 SNS에는 더 그럴듯해 보이는 적도 기념탑, 말하자면 가짜 적도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 다들 멋있다 좋다 잘한다 그러는데 같이 남미에서 만났던 L이며 P 등이 줄줄이 댓글을 달았다. "거기 진짜 적도 아닌데..." 가본 사람들만 아는 우리끼리의 진실이랄까 :P.


매거진의 이전글 42. 그리웠던 도시의 그 풍경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