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짱없는 베짱이 Dec 26. 2018

42. 그리웠던 도시의 그 풍경은

2017.7.22. 키토, 에콰도르(D +166)

도시다. 드디어 큰 도시에 도착했다. 페루의 수도 리마를 떠난 지 약 2주 만이었다. 우리 네 명은 모두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뜨기 마냥 눈이 동그래져서는 널찍하게 뻥 뚫린 도로를, 다닥다닥 끝없이 이어지는 건물을, 해가지는 노을 아래로 펼쳐진 도시의 지평선을 눈에 새길 듯이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식민지풍의 크고 멋들어진 건물과 광장에서 왠지 모를 향수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서 와, 여기까지 잘 왔네."


그리움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불쑥 찾아온다. 반가운 목소리, 웃으면 양볼에 보조개가 콕 들어가는 그녀가 까매진 얼굴 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겼다.  

L과 나는 한국에서부터 서로 알던 사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코이카(KOICA) 단원이 되어 에콰도르로 떠난 것을 모르고 있었고, 그녀는 내가 홀로 이 긴 여행길에 오른 것을 몰랐다. 그랬던 우리가 우연히 마주친 곳은 약 5개월 전, 뜻밖의 멕시코, 여행자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해변 플라야 델 까르멘(Playa del carmen)의 호스텔에서였다. 타지에서 우연히 재회한 오래된 인연을 신기해하면서도 각자의 일정에 따라 곧 다시 발길을 옮겨야 했으니, '언젠가는', '다음에 또' 같이 미래를 기약하는 인사도 없이 헤어졌더랬다. 그랬던 그녀를 돌고 돌아 이곳 남미 땅에서 다시 만날 줄이야.  


에콰도르의 작은 마을에서 일하고 있다는 L은 주말에 있는 행사 때문에 마침 키토에 온 참이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깊어지는 마음의 크기도 표현할 수 없겠지만, 원래 알던 인연을 낯선 곳에서 마주했을 때 그 그리움이나 반가움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미 이 도시를 구석구석 꿰뚫고 있는 L이 우리의 일일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도시다, 큰 도시다!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Quito). 적도선 바로 아래이지만 고도가 높아 쾌적함이 유지된다는 이곳은 잉카시대 이전부터 도시가 존재했던 곳으로 역사가 깊다. 세월에 따라 북방잉카제국의 수도, 스페인의 식민도시로 끝없이 역할을 바꿔오며 주요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았던 키토는 남미에서도 아주 잘 보존된 '올드타운' 중 하나로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10대 문화유산도시로 지정됐다.

누군가는 이 도시를 바라보며 유럽의 어느 거리가 떠오른다고 했다. 유럽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여기서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 볼리비아의 라파즈(Lapaz), 쿠바의 아바나(Havana) 같은 곳을 떠올렸다. 분위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딘가 닮아있는 생김새. 왠지 모를 향수와 설렘은 그저 오랜만에 도시를 밟기 때문이라기엔 어느새 익숙해진 그 모습들이 반가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키토의 바실리카 대성당.


키토의 관광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이 남아있는 구시가지에서 이루어진다. 그 안에서도 대표적인 관광명소라면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고딕 양식의 첨탑이 인상적인 바실리카 대성당을 꼽을 수 있다. 야트막한 언덕에 싸여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성당은 새파랗게 빛나는 하늘과 어우러져 엄숙하면서도 여유롭고 또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실 이곳엔 반전의 역사가 숨어있다. 한때 잉카인들이 세운 태양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전을 부수고 그 돌로 그 자리에 이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역사의 일면은 일부러 찾기 전까지 그 흔적을 알기 어렵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식민지 이전의 모습이 지워지고 없다는 이 도시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이란 너무나 유럽 풍인 이 모습들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에콰도르는 자국의 화폐가 따로 없이 달러를 사용하는데, 2달러를 내면 성당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성당의 규모가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던가, 크기도 그렇지만 하늘에 닿을 듯 꽤나 높게 솟아있는 이 성당 첨탑의 전망대에 오르면 키토의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날씨가 맑아 저 멀리 산너머의 구석구석까지 눈에 다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까운 거리, 성당에서 마주 보이는 또 하나의 동산, 거의 꼭대기까지 빼곡하게 건물이 들어선 그 동산 위에는 키토의 또 다른 명물이라는 파네시요(Panecillo, 파네시죠 라고 읽기도 한다) 성모상이 도시를 내려보고 있었다.


파네시요 성모상.


돌조각을 모자이크 한 듯한 격자무늬와 틈새로 하늘의 파란빛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얇은 손가락. 자칫 기괴해 보이는 느낌마저 드는 파네시요 성모상은 도시를 굽어 살펴보는 존재라기엔 어딘가 가냘프고 불안정한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손에 들고 있는 쇠사슬은 성모가 밟고 있는 문어 혹은 거북이, 혹은 뱀으로 보이는 무언가의 족쇄와 이어진다. 성경에 나오는 악을 물리친 모습이라고도 하는데, 이야기에 따르면 뱀을 제압하고 올라선 이 성모상은, 뱀을 신성시하던 잉카인들 식민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탁 트인 성모상의 주변은 산책하기 좋은 공원처럼 잘 정돈이 되어 있다. 아래로는 도시의 전경이 끝도 없이 펼쳐지니 역시나 대표적인 야경 명소 중 하나. 그러나 성모상이 딛고 있는 이 파네시요 언덕은 키토에서도 유명한 빈민촌으로 강도나 사건 사고가 많아 바가지를 쓸지언정 안전을 위해 무조건 차로 이동하는 것이 좋단다.   


멀리서 바라보는 파네시요 언덕과  그 꼭대기의 성모상.


그동안 숙소 때문에 사서 고생을 몇 번 했던 우리는 이번에는 아주 좋은 곳에 작정하고 머물기로 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의 강남쯤이려나, 키토의 신시가지 내에서도 부촌이라는 곳에 있었다. 경비가 있는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과 수영장이 있고, 맨발로 돌아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 깔끔한 마루 바닥이 깔린 집에는 창문도 큼지막한 커다란 방이 세 개. 집 밖을 나가면 5분 정도 거리에 맛있다는 빵집과 착즙 주스 집, 남미에서 유명한 후안발데스 카페, 넓은 도심 속 공원이 있었다. 도시의 낭만을 만끽하기에 아주 완벽한 장소였다.


저녁에는 L을 초대해 다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간의 여행길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 남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 이곳에 와서야 깨닫게 된 어떤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밤새 나누었다. 구시가를 돌아보며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몰랐을 내용을 알게 되었던 것처럼, 그녀에게 힘들었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또 다른 생각들이 그제서야 떠오른다. 그럼 그때 그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래도 힘들던 그 일이 이 여행을 계속하는 힘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한때 좋게만 보았던 것의 안좋은 부분이 보이고, 또 안좋게 보았던 것의 좋은 부분이 보인다. 사실 애초에 평면의 세계가 아닌 다음에야 한 면만 가진 동전이 있을리가 없다. 그저 뒤집어볼 생각을 안했을 뿐. TV와 사진으로만 알던 이 대륙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처럼, 가끔은 나도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처럼, 이곳에서 다시 만난 L도 내가 한국에서 알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지 우리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나눈 순간이 또 없었기도 했다. 마침 그 만남이 바다 건너의 땅에서 우연하게 이루어졌다니 이것도 참,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다. 그러고보니 지금 난 내가 늘 알던 그 지구의 반대편 모습을 보는 중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41. 할 수 없다면 먹고 마시고 즐기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