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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연 Sep 04. 2018

시선의 이유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늘 내 신경을 거슬렀다.



마실 것을 묻는 물음에 아이는 여자의 기호를 되물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맞춘 채 싱긋 웃었다. 별 것도 아닐 행동에 꺼림칙한 기분이 든 까닭은 무엇일까. 그 아이는 밝았다. 본연의 기질도, 세상 물정에도. 그러면서도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않았고, 검다기보단 회색 빛이 감도는 두 눈동자는 늘상 어딘가를 향해 올곧이 꽂혀 있었다. 허공을 맴도는 법이 없었다. 예외없이 목적지를 찾아 찍어 내리는 눈망울이라니. 과장을 조금 보태 속이 부대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한번은 그 애와 어깨가 부딪힌 적이 있었다. 귀책자를 따지자면 몰려드는 인파에 맥없이 떠밀린 내 쪽이었다. 제법 거칠게 아이의 어깨가 꺾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내 주변 어딘가로 짧게 눈길을 준 뒤, 괜찮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어낼 뿐이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딱 떨어지는 그 행동에 이상하게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편협한 시각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제법 편견에 물들지 않은 쪽이라 자부한다. 헌데 내 자아에 대한 확신을 그 아이는 우습게 조각내 버린다. 비정상적인 인과관계로 사고회로를 마비시키고, 미처 판단 지을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신경을 앗아가 버린다



사건은 어느 날 복도였다. 적막조차 자취를 감춘 텅 빈 공기를 타고 그와 내 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마주해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심박 소리에 점점 묻혀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걸어가며 내 걸음새가 이다지도 어색했는지를 생각하니, 호흡조차 가빠질 지경이었다. 좁은 복도 가운데에서 그의 옷깃이 마침내 가방을 스쳤다. 그 순간까지, 그는 단 한 줌의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흘겨본 그의 안색은 평온하다 못해 지루함을 드리었다. 잔잔한 눈망울은 줄곧 정면 어딘가를 또렷이 응시한 채였다.



돌연 엄습한 감정은 분노였다. 잠시 걸음을 멈춰 선 내가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지만, 소리내기를 멈춘 발소리 따윈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정직한 발걸음에 몸을 실은 그가 마침내 자취를 감춰버렸다.



내가 이상한 걸까? 이제는,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단전에서부터 호흡이 막혀온다. 급하게 삼켜내다 얹혀버린 음식물을 억지로 밀어내는 심정으로 그에 대한 신경을 점멸 시켜보려 무던히 노력해봐도, 놀랍게도 결국은 제자리다. 가장 나를 미치게 하는 지점은, 내가 이토록 그를 못마땅해 하는 마땅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아이에 대한 뿌리 깊은 불편함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활개하고 있기에, 의식의 힘으로 선뜻 그것을 제어하기 어렵다.



그렇게 나는 도주를 택했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 삭아가는 나를 해방 시켜야만 했다. 그 뒤론 의도적으로 그를 피했다. 애초에 접점이 잦았던 관계는 아니었기에, 일방적인 외면을 통해 그의 존재는 하릴없이 증발되어갔다.



순조롭게 아이의 영향력이 생활반경 내에서 사라져갔다. 이제는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감정에 남몰래 괴로워할 일도 없었으므로, 한결 편안 해졌다. 불현듯 그의 잔상이 껄끄럽게 마음을 스칠 때면, 고개를 휙휙 털어 떨쳐버리면 그 뿐이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애초부터 놓아 버렸어야 할 끈이었기에.

나는 그 누구도 알아 줄 수도, 이해해줄 일도 없는 일인극을 찍어내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랬다.





그런데, 흔하지 않은 평일 오후 한때였다. 시끄럽게 울어 대는 매미소리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어우러졌다. 그 협음은 더 이상 소음이 아니었다. 달각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마저 풍경의 일부였다. 무심결에 들어선 빈 방엔 아이가 있었다. 가지런한 머리칼이 드리운 뒷모습이 창가에 비친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구름이 해를 가렸고, 마침내 그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비록 뒷모습 뿐이었지만, 분명 그였다. 그 형체를 내 두 눈 가득 담게 된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결이 그의 가는 머리칼을 흩뜨렸다. 난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그를 지켜봤다.



원래라면 지체없이 걸음을 돌렸어야 했겠지만, 무언가에 열중해 머문 굳건한 뒷 매무새가 발끝을 잡아 묶었다. 그와 내 사이를 빈틈없이 채운 미지근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 돌며 긴장감을 늦추자, 일전엔 느끼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분명 이곳에 서 있지만, 그는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등져진 시야가 가져다 준 미묘한 안정감 덕분인지, 그에게로 향한 시선의 감촉이 불편함으로 끝맺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그의 곳곳을 머물었다. 하지만 그가 내 인기척을 느껴 불현듯 고개를 젖히게 된다면, 아마 난 도망치게 될 것이다. 왜 일까. 나는 왜 그를 양지에서 또렷이 마주하지 못하는 것인가. 어쩌면 이제껏 내가 두려워했던 그는, 두 동공을 지닌 정면의 그였다.



마지못해 던져진 듯 포장된 시선은 어김 없이 그의 자취를 쫓곤 했다. 그의 온기 없는 시선이 잠시라도 내 주위를 스치게 될 지라면, 연약한 나의 피부는 여지 없이 화상을 입었다. 그는 맹점을 짚더라도 내 감각 안에 얽매였지만, 나는 시야 속에 들더라도 그의 눈길을 잡지 못했다. 비딱한 나의 시선이 그의 살갗을 매섭게 스칠지라도, 한치의 상처도 낼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나의 모든 것에 무지했다. 결국 깨닫았다. 나는 그 아이를 싫어한 것이 아니다. 그 아이의 관심을 갈구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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