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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연 Oct 11. 2018

끓는 점

취준생의 하루


이번달을 기점으로 정확히 1년 8개월째다. 이 레이스에 몸을 싣게 된 지도. 구태여 세려고 했던 건 아닌데, 무심코 들어온 다이어리 속 숫자가 그랬다. 조바심이 없다면 거짓말 이겠지만 쉽게 좌절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단지 시기가 좋지 않았고, 운이 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책임을 나에게로 돌리자면 끝도 없으며, 자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성실하게 움직이면 된다. 난 그만큼 단단한 사람이다.



아침 스터디를 마친 뒤 허겁지겁 아르바이트 장소로 향했다. 주택가에 있는 작은 카페다. 5분을 남기고 도착해 재빨리 유니폼을 갈아입고 질끈 머리를 묶었다. 빠듯한 시간 탓에 점심을 먹을 겨를은 없지만, 마음씨 좋은 점장님은 늘 내 몫의 케익을 슬쩍 빼놓아 둔다. 운이 좋았다. 이런 점장님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오늘은 라떼 위의 하트거품도 제법 봐 줄만 했다. 음료를 서빙하고선 카운터에 앉아 케익의 모서리를 포크로 찌르려는 데, 손님이 머그잔을 든 채 이리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얼른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 섰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신가요?”

“아니, 난 분명 아이스로 시켰는데?”



구겨진 안색에 이후의 상황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내가 싱긋 웃으며 사과했지만, 벌레라도 씹은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곧이어 그는 카운터 밑 정갈하게 펼쳐진 영단어장을 흘기며 말했다. 저런 거에 한눈이나 팔고 있으니까 주문도 까먹지. 학생, 공부는 할 때 하는거야. 근무시간엔 일을 해야지 웬 유난. 남자는 혀를 끌끌 차며 자리로 돌아갔다. 따뜻하게 준비해 드리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포스기 앞 나란히 놓인 단어장과 케익 한 쪽이 괜스레 민망해져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뭐, 그래도 상관 없다. 저런 종류의 인간에게 소모되기엔 내 감정이 귀중하다. 난 너덜너덜한 단어장을 거칠게 접어 카운터 아래로 구겨 넣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자소서 2개를 갈아엎어야 한다. 먼저 점수 만료기간을 앞둔 토익 시험을 접수하려 접수창을 켰는데, 기간을 착각해 추가접수 기간이었다. 4천원을 더 내야한다. 한숨이 내뱉어졌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까짓 거 밥 한끼 거르면 된다. 결제를 했는데 문자음이 울린다. 잔액부족. 맞다. 어제 핸드폰비 빠져나갔지. 게다가 인적성 책도 새로 샀으니, 당연한 거다. 월급날은 3일 뒤였다. 어쩌지. 이번에 시험을 쳐야 원서 접수기간을 맞출 수 있다.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다 핸드폰 연락처를 뒤적였다. 익숙한 이름 몇 개를 지나쳐 내린 후 이내 홀드키를 누르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됐다. 그냥 집에 있는 만화책 몇 권 팔면 된다. 자국이 남는 것이 아까워 제대로 펴 본적도 없으니, 중고사이트에 올리면 몇 시간내에 연락이 올 것이다.



그렇게 자소서 쓰기에 열을 올리다 도서관 밖을 나서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엄마였다. 3일전에 떨어진 최종면접 결과를 받아본 이후로 쭉 연락을 못했다. 못 본척 지나치려다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키를 눌렀다. 밝은 내 인사말에 대고 돌아온 조심스러운 음성에 마음이 살짝 쓰렸다. 엄마. 기업들이 미쳤나봐. 보는 눈들이 너무 없어. 나 그냥 귀농이나 할까? 능청스럽게 던져진 말에 엄마가 결국 너털웃음을 흘린다. 나도 뒤따라 웃었다. 늘 그렇듯, 내 끼니를 걱정하는 걱정스러운 음색에 서둘러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엔 이상한 세포가 있다. 나는 그것에 매우 취약해서, 그 세포는 자칫하면 내 고막을 타고 들어와 곧바로 울대를 막히게 한다. 눈망울까지 침입하는 것 또한 시간문제다. 다행히 오늘은 제한시간을 잘 지켰다.



저녁엔 간만에 친구들을 보기로 했다. 취준 기간이 길어진 탓에 연락을 거의 못 했었는데, 그 중 한 명에게 얼마전 연락이 왔다.



‘지은아 취준하느라 바쁜건 알겠는데 우리 너무 잊고 사는거 아니야? 그래도 한번 봐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먼저 안부를 건넨지가 언젠쯤 인지도 기억에 희미하고, 최근엔 오는 연락에도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까. 서운할 법도 하다. 나는 원래 사람을 참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결국 오늘 저녁에 약속을 잡아버렸다. 토익 접수할 돈도 없는 주제에 저녁 약속이라니. 쓴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도 간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썩 나쁘지 만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몇 달만에 SNS를 켜봤다. 잊고 지냈던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를 빠르게 스친다. 멀끔한 정장. 여행 사진들. 예쁜 인테리어의 카페. 액정 속 환하게 웃고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몇 년 전 내 기억속의 그것과 겹친다. 달라진 것은 사진 속 나의 부재 뿐이다. 그래, 너희들은 정말 그대로 구나. 나는 보푸라기가 얼핏 빠져나온 후드티 소매를 슬쩍 움켜쥐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옷을 갈아입으려 집에 도착하니 택배상자가 문 앞에 놓쳐져 있었다. 일주일 전 약속을 잡은 이후, 도저히 신고 나갈 멀쩡한 신발이 없어 급하게 주문한 여름 샌들이었다. 인터넷 최저가로 정확히 만원에 구입했다. 상자를 열어 실물을 확인하니 꽤 마음에 들었다. 끈 두개가 발등 위를 가로지르는 디자인이었는데, 만원 치고는 제법 근사했다.


오래 입지 않아 먼지가 쌓인 원피스 한 벌을 꺼내 걸치고 새로 산 신발을 신고선 집 문을 나섰다. 어느새 어둠이 차오른 어스름한 하늘엔 초승달 한 쪽이 걸려있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은 수분기 없는 피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모처럼 하트거품이 봐 줄만 했고, 금세 팔릴 만화책이 있고, 새로 산 신발이 예쁘고 하늘에 걸린 저 달 한쪽이 마음을 채워주니,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꽤 괜찮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입꼬리를 힘 있게 끌어당기며 식어버린 아스팔트 위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한발, 두발, 세발… 열 발 째쯤 이었다. 오른 발등 위를 감싼 샌들 끈 한 쪽이 순간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의지할 곳을 잃은 오른 발이 허공을 설핏 맴돌았다.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내가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허리를 숙여 신발을 확인했다. 그저 몇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발등 위의 끈은 맥없이 끊어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싼 게 비지떡이다. 달랑이는 끈 한쪽은 싸구려 신발 한 켤레에 물색 없이 들뜬 내 모습을 비웃고 있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도리 없이 끊어진 신발끈을 매만졌다. 그 순간, 숙여진 고개 아래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눈물은 그대로 신발을 스쳤다



셀 수 없는 탈락의 고배를 들었을 때도 멀쩡했던 난데, 그저 신발일 뿐인데. 그깟 신발 따위, 한 켤레 더 사면 그만인데. 그럼에도 내 발등 위에서 맥 없이 끊어진 그 한 가닥의 신발 끈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슬프게 했다. 의지와 다르게 트여진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하고 많은 정상품들 가운데 이 불량품은 왜 나에게 보내어진 걸까. 애초에 그럴듯한 신발 하나 살 돈도 없는 내가 문제인 걸까?

혹은, 이 불량품이 나에게 가장 걸맞는 감투는 아닐까. 어쩌면, 나에겐 멀쩡한 한 켤레의 신발조차 허락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고장 난 신발 한 짝이 눈물로 흥건히 적셔질 때 까지, 울음을 토해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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