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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Nov 07. 2023

100년만에 무대에 오른 김명순의 ‘의붓자식’

제1세대 신여성 작가 김명순의 슬픈 삶과 문학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의 첫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을 아십니까?

우리는 나혜석과 김일엽은 알아도 김명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왔다. 그녀가 남긴 희곡으로 만든 연극 <의붓자식>을 보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을 찾았다. ‘100년 만의 초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1923년에 쓴 희곡이 100년만에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사진 제공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연극은 아버지의 폭력적인 중혼으로 의붓자매가 된 세 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첫째(성실)와 막내(탄실)의 어머니는 오래 전에 극단적인 선택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둘째(부실)의 어머니가 집안을 장악하여 의붓자식들을 핍박한다. 예술가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1세대 신여성 성실은 자신이 원하는 바와 신념을 잊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친다. 그러나 높은 현실의 벽은 그를 끊임없이 고통에 가두고 병마까지 겹쳐서 힘든 나날을 보낸다. 게다가 성실의 아버지는 성실의 연인 영호를 강제로 둘째 딸 부실과 혼인시켜서 큰 상처를 안겨준다. 영호는 성실을 못 잊지만, 성실은 결국 죽음을 택하는 비극적인 스토리이다.


성실은 자신을 잊지 못하는 영호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끊긴다 하면 곧 죽음이오, 멸망입니다. 그러나 난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우주가 무한대인 것과 같이 인생, 즉 사랑도 무한대이외다. 내 미움을 갈아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오."

"우리 곤란하더라도 희망하기로 해요. 나만은 기필코 내 편이 되어주렵니다."



<의붓자식>은 작가 김명순의 삶을 연상시킬 만한 자전적 얘기이다. 다만 원작 희곡에서는 성실이 연인마저 빼앗긴 후 가련하게 죽어가는 데 비해 윤사비나 연출의 이번 공연에서는 가부장적 사회의 속박에 저항하는 주인공의 주체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극의 마지막에 성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런 속박에 대한 항거의 의미를 담고 있다.  

김명순(1896∼1951)은 등단 이후 20여 년간 소설 25편, 수필 20편, 시 111편, 희곡 2편, 번역소설 1편, 번역시 15편 등을 발표했다. 그녀는 여러 외국어에도 능숙했고, 일본 유학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조선의 세 번째 여성 기자이기도 했다. 당시 많은 작가가 친일로 변절하는 동안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기구했다. ‘기생 출신 첩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다. 1915년 일본 유학 중 강간 사건의 피해자가 되지만 당시 가부장적 문화에 갇힌 문단에서는 그를 ‘문란한 여자’라고 비난했다. 소설가 김동인은 신여성들이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내용의 ‘김연실전’을 출간했는데 김명순이 모델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이런 분위기에 김명순은 절망하며 조선을 떠났다. 도쿄에서 살면서 생활고를 겪던 김명순은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수용됐다가 외롭게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극중에서 성실은 자신의 시를 낭독한다. 시의 제목은 '유언'이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졋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다재다능하고 뚜렷한 자기 철학을 가진 신여성이 가부장적 사고에 갇힌 시대 속에서 어떻게 고통받았던가를 김명순의 작품들은 알려주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김명순은 자기의 길을 가려는 믿음을 지키던 여성이었다. 연극 <의붓자식> 공연을 계기로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김명순이 우리 문학사에 돌아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외롭고 갈 데 없는 사람일수록 자유를 구하는 마음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 <의붓자식> 가운데서

연출: 윤사비나
출연: 강주희, 이찬솔, 조정근, 허이레, 이경구, 황재희, 김희정,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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