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서는 포기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는 사랑의 인연
*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를 관람했다. 정식 개봉은 6일부터지만 일부 상영관에서 간헐적으로 상영을 시작했기에 광화문 씨네큐브를 찾았다.
오는 3월11일 열리는 제9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신인 감독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각본상, 작품상 후보에 올라있는 작품이다. 스토리는 단순한 편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소개는 이렇다.
“12살의 어느 날, '해성'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첫 사랑, '나영'. 12년 후, '나영'은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 SNS를 통해 우연히 어린시절 첫 사랑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한 번의 12년 후,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을 찾은 '해성'. 수많은 "만약"의 순간들이 스쳐가며, 끊어질 듯 이어져온 감정들이 다시 교차하게 되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기억일까? 인연일까?”
서로 어린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가 12살 때 헤어진 나영(그레타 리)과 해서(유태오)는 12년 만에 화상통화로 재회의 기쁨을 한동안 누리다가 관계는 일단 끊어진다. 그로부터 12년 후 다시 해서는 나영을 만나러 뉴욕으로 간다. 나영의 이름은 이제 노라, 그녀의 남편 아서도 무척 좋은 사람이다. 나영과 해서는 너무도 반갑게 24년만의 재회를 하고, 어린 시절의 친구로 돌아간 듯이 함께 다닌다. 노라는 그 사실을 남편 아서에게 알렸고, 화가 났느냐고 묻기도 한다. 아서는 그런 상황이 달가울리야 없지만 그래도 노라를 이해하면서 셋이서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영화 곳곳에서 노라와 해서는 아직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음이 나타난다. 하지만 둘은 사랑한다는 얘기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지금이 우리 삶이고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야.” 노라가 아서에게 말했던 이 말은 현실을 인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노라는 ‘인연’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하다가 해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아닌 것 같아”
영화에서 ‘인연’은 대단히 중요한 키워드로 나온다. 셀린 송 감독은 GV에서 "(극에서)인연이라는 단어밖에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인연이라는 단어를 설명함으로써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그 의미를 알게 됐다"면서 "인연은 한국어이지만, 전 세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나 느낌이다. 그 감정에 이름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영화가 담고 있는 정서는 한국국적이기도 하고 세계적이기도 하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대단히 복잡한 감정을 안겨준다. 20대 시절에 화상으로 재회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싱그럽고 아름답다. 첫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나영과 해서의 마음을 읽다보면 그렇다. 그러나 다시 12년이 지난 현실 속에서 만났을 때 등장하는 모두의 감정은 오묘하고 복잡해진다. 나영과 해서는 이제는 같이 살 수 없는 현실을 알기에 감정선을 넘는 일이 없도록 절제한다. 나영의 남편 아서도 해서가 뉴욕까지 와서 나영을 만나는 상황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두 사람을 포용한다. 슬픈 절제의 아름다움을 세 사람은 보여준다.
영화는 과도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요동치는 일 없이 그저 잔잔하게 흘러간다. 나영과 해서는 해어져야 할 운명이지만 슬프기 보다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영이 자기 집에 왔던 해서를 배웅하고 들어오는에 집 계단에 아서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나영은 아서를 껴안으며 흐느낀다. 그동안 참았던 무엇이 아서의 품 속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절제하는 두 사람을 아름답게 생각했던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랑을 기억한다고 해서 인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기억으로만 남을 수 있는 것이고, 인연은 여러가지 것들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패스트 라이브즈>라는 제목에 대해 셀린 송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평행 우주나 다중 우주를 넘나드는 판타지의 영웅은 아니지만, 우리는 굉장히 많은 시공간을 지나기 때문에 그 와중에 두고 가는 자신의 어떤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패스트 라이브즈'가 된다고 생각한다.”
참 잘 만든 영화다. 셀린 송 감독은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이 영화를 이끌었다. 그레타 리의 연기는 압권이다. 대사를 말하기 이전에 표정으로 말 이상의 말을 하곤 한다. 음악도 마지막 순간까지 좋다. 이런 영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