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의 텃밭일기 : 주말에만 가기로 해놓고
지자체에서 내게 작은 땅을 하사하였다. 우연히 연초에 열리는 가족농장 모집글을 보고 신청했는데, (무작위) 심사에서 당당하게 합격(?)하고 만 것이다. 원체 조심성이 많고 준비성이 철저한 나는 당첨 문자를 보자마자 덜컥 겁부터 났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여자가 일을 키웠으니 이걸 어쩌지 싶었다.
뭐든지 모르는 건 책과 글로 방법을 찾는 고리타분한 타입의 나는, 이번에도 서점을 이용했다. 도시농부 책을 약간 사 왔고, 몇 권은 도서관에서 대여했다. 도시농부, 주말농장, 베란다 텃밭 등의 키워드를 활용해 검색엔진에서 손가락이 불나게 검색도 해보았다.
늘 그렇듯, 어느 정도 매뉴얼은 익혔다. 머릿속에서는 시뮬레이션이 완벽했다. 그러나 행동의 결과는 예측과 다를 수 있는 법.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난 처음 하는 일을 마주할 때 그 일을 전체적으로 그려봐야 마음이 편해진다. 1부터 10까지의 일 중에서 4의 일을 내가 맡았다고 할 때, 나는 적어도 2에서 6까지, 아니 7까지의 일은 이해하고 일의 진행사항을 파악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성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야무진 성격?
완벽주의자?
걱정도 팔자?
꼼꼼한 성격?
꽤 높은 위기대응 능력?
아마도 나는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은 사실 바꿔 말하면 '타인에 대한 불신'이다. 상대가 일을 잘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 시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3을 해서 내게 4의 일을 넘겨줘야 할 상대가 갑자기 배가 아파 3의 일을 못 해온다면? 상대의 집안에 갑작스러운 우환이 닥친다면? 3이 실수를 했는데 내가 캐치하지 못한 채로 틀린 정보를 가지고 4의 일을 잘못 마친다면? 이런 생각의 꼬리는 정신건강에 좋지 않지만 일의 완성도에는 제법 효과적이다. 그래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것과는 별개로 제법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되어 있기도 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4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5의 일을 맡은 사람에게 일을 넘겼다고 상상해 보자. 그야말로 등골이 서늘한 상상이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곤혹스러운 상황이라니, 절대 만들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다. 이렇게 불가능한 완벽에 도달하려고, 나는 매번 모든 것들에 '애씀'을 소모했고, 그러느라 내 마음이 여러모로 애먹었다.
그래서 나는, 염려에 염려를 더해 일을 처리한다. 일 년 간 맘대로 농사를 지어보라는 뜻으로 지역 구민에게 무료로 나눠 준 작고 작은 농지를 대하는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내 농지를 제대로 가꾸지 못해 옆 텃밭에 피해를 줄까 걱정이 되었다. 내 밭의 해충과 잡초가 옆텃밭에 스멀스멀 넘어가지 않을까 지레 상상하고 그럴 일을 차단하기 위해 <주말농장 농약>을 검색하고 아무래도 주말농장에 농약을 사용하는 건 내키지 않아 <주말농장 친환경>, <주말농장 농약 대신>, <천연 해충제> 등을 검색해보고는 했다.
내 밭을 처음 보러 간 날을 잊지 못한다. 밭마다 작은 팻말이 꽂혀 있었고 거기에는 자신들의 고유 번호가 적혀 있었다. 나는 제법 가운데였다. 좌우위아래, 네 개의 옆 밭들을 다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다.
흙 위에는 20킬로그램짜리 비료 한 포대가 놓여 있었다. 첫 번째 임무였다. 특별히 교육은 없었으니 알아서 비료를 섞으란 뜻이었다. 눈치껏 옆 사람들이 하는 모양새를 지켜봤다. 흙을 뒤엎으며 비료를 골고루 섞으면 되는 일이라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송골송골 땀이 좀 맺혔지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허리를 굽혀 일하면서도 틈틈이 주변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관찰했다.
그들이 농기구 보관소에서 가져오는 농기구를 지켜봤다가 똑같은 걸로 가지고 왔다. 촘촘한 간격으로 고랑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고, 큼지막한 간격으로 서너 개의 고랑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아예 고랑을 만들지 않고 하나의 직사각형 텃밭 그대로 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선택해야 했다.
대체적으로 다들 고랑을 많이 만드네. 이게 대세인가 보군.
사실 나도 고추랑 토마토, 상추, 감자... 이것저것 많이 키우고 싶었잖아.
적어도 일곱 개는 심을 것 같은데 일곱 줄은 만들어 볼까.
집에서 책과 인터넷으로 본 모든 지식은 삽시간에 머리에서 휘발됐고, 옆 텃밭, 옆옆 텃밭, 건너 건너 텃밭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만 흘깃대며 보기 바빴다.
좁고 자잘한 고랑 간격이 내심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조금씩 심어 수확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나는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서둘러 모종을 사러 길을 나섰다. 아직 감자는 나오려면 멀었고 상추도 때가 아니라고 모종집 사장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배운 모든 '글'들은 어디 가고 여기서 나는 초보 티를 팍팍 내며 우왕좌왕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몇 가지의 모종만 어설피 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간단히 밥을 먹고 나니, 다시 텃밭에 가고 싶어졌다. 궁금했다.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생겨버린 것이다. 처음 주말농장 신청을 할 때는 말 그대로 주말마다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이틀에 한 번씩 가서 물을 주고 왔다. 어느 때는 매일도 갔다. 한 번 가면 옆집 텃밭도 구경하고, 옆옆집, 옆옆옆옆옆옆옆옆집 텃밭도 구경하고 왔다. 작은 원두막에 앉아 하늘을 보며 멍 때리기도 하였다.
그간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은 <무한 달리기>였다. 쉬는 걸 죄악시하며 살아왔다. 한량 같던 저 날들을 더 즐겼어야 했다. 종종걸음으로 1분 1초를 살았다. 여기서는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바람이 잎사귀들을 쓸고 가는 시간을 내버려 두어도 되지 않을까. 볕이 땅 속에 스며들 때까지 좀 더 기다려도 되지 않을까. 그간 시간을 쫓을 줄만 알던 난, 시간을 기다리는 법을 어렴풋 알 것도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