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자 소쉬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용어를 고안하고 정의했다고 한다. 시니피앙은 어떤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 시니피에는 기호로 의미하고자 했던 바로 그 대상 정도의 뜻이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후에 이 용어들을 본인 입맛에 맞게 사용하면서 시니피에는 시니피앙 아래로 끝없이 미끄러진다고 표현했다.
다들 연애감정을 이야기할 때 상대가 귀여워보이면 끝이라는데, 나는 상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면 끝이다. 감정은 음(-)의 영역에 속해서 감정의 절댓값이 큰 쪽이 부등호의 아픈 송곳에 찔리기 마련인데, 편지로 마음을 가시화하겠다는 다짐은 곧 자진하여 기꺼이 그 송곳에 내 심장을 겨누겠다는 것이다.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불완전한 문장들을 써내려갈 때마다 내 안에서 무르익은 어떤 마음이 감당은 커녕 표현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애써 빚어보고자 했던 시니피에는 시니피앙 아래로 끝없이 미끄러져 내려가겠지만, 이제 와서 편지지를 찢을 순 없다. 시지프스의 현신이라도 된 것처럼 펜촉으로 감정이란 이름의 바위를, 질량이 음수인 그 바위를 있는 힘껏 굴려올리는 것이다. 언어의 보잘것없음과 하찮음과 부족함과 한계를 직면하면서.
첫 인사를 쓰기 전에, 마지막 줄에 내 이름을 적은 후에, 나는 마지막 발버둥의 일환으로 편지를 쓴 그날의 날짜와 쓰기 시작한 시각 그리고 마무리한 시각까지 첫 줄에 적어넣는다. 숫자 나부랭이들도 결국 기호이며 내가 편지에 우악스럽게 욱여넣어보고자 하는 그 순간의 무드조차도 그 기호들 밑으로 추락할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