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음 날 연우는 자기 방에서 아침 7시쯤에 깨어났다. 4평 남짓한 방은 먼지가 조금 쌓였을 뿐 몇 달 전 모습 그대로였다. 벽에 걸린 달력은 개나리가 노랗게 물든 비탈진 산의 풍경을 담은 채 3월에서 멈췄다. 시간을 거스르듯 넘겨진 달력은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멋스럽게 펼쳐진 산길 그림에서 멈췄다. 10월이었다. 연우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이 방의 시간은 긴긴 10월을 보내리라. 책상에는 읽다만 책들도 몇 권 눈에 띄었다. <피로사회> <투명사회> 같은 제목이 언뜻 보였다. <큐>라는 아주 두꺼운 소설도 책상 한 모퉁이를 차지했다. 옷걸이엔 봄옷도 몇 벌 걸려 있었다.
거실로 나가자 식탁에는 아침밥이 차려졌고 엄마가 남긴 메모지도 누군가의 시선을 기다렸다.
- 밥 먹고 가. 반찬도 꼭 챙기고!
냉장고 안을 살피자 엄마가 새벽 일찍 바리바리 싸두었던 묵직한 비닐가방이 보였다. 안에는 김치, 젓갈류, 멸치볶음, 삶은 찰순대와 몇 가지 밑반찬이 들어있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지만 엄마는 기어코 당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는 연우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집 밖을 나서 국밥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을 것이다.
연우가 식탁에 차려진 밥을 먹고 반찬도 챙겨 집 밖을 나서자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경험했다. 지금처럼 기분이 찜찜해 만류하고 싶었지만 여장부 기질이 있는 엄마한테는 어림도 없다. 절반 이상의 반찬은 먹지도 못한 채 음식쓰레기통에 처박힐 운명이다. 씁쓰레한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엄마가 당신의 마음만 믿고 벌인 일, 아들은 미처 먹지 못해 오랜 시간 방치된 음식을 그냥 버릴 수밖에 없다.
"연우야, 너 있는 데로 이사 갈까?"
"네?"
"거기도 전원주택이 있겠잖아. 좋은 집 구해서 편하게 살고 싶구나. 가끔씩 카페 일을 도우면서 용돈도 벌고."
"정말요?"
"아버지랑 얘기도 했다. 싫지는 않은 모양이야."
간밤에 엄마가 넌지시 꺼낸 말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조만간 현실화될 수 있다. 연우는 굳이 반대하지 않았지만 옹호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은 30여 년 국밥집 인생을 정리하고 폐가처럼 보이는 낡은 저택을 떠나 자신들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 강변 카페 가까이 전원주택을 구한다면 혹시 알겠는가? 홍차를 좋아하고 독서토론회 모임을 주도하던 중년 부부와 함께 카페서 유쾌하게 웃고 떠들지. 하지만 금요일 밤마다 연우가 겪는 낯선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두 분의 삶에 근심 걱정 한 덩어리를 저울에 달듯 추가하게 될 뿐이다.
"카페 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던 이유 말해 줄까?"
"..."
"너한테서 아버지 모습을 봤기 때문이야."
"..."
"카페 얘기를 꺼냈을 때 차라리 잘됐나 싶었어."
엄마가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이때부터 강변을 염두하지 않았을까. 강변 쪽으로 이사계획이 언제쯤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말로만 끝날 수 있고, 예상보다 빨리 전원에서 새롭게 노후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다. 연우는 기분이 묘했지만 두 분의 선택에 대해 뭐라 대답할 순 없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지금은 아니었다. 금요일 밤을 해결하지 않는 강변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위태한 나날이 될 것이다.
2.
연우가 춘천행 전철을 타고 백양리역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쯤이었다. 서울 다녀온 시간이 꼬박 24시간 걸린 셈이다. 하루간 외출이었지만 연우한텐 길고 긴 여정처럼 느껴졌다. 역 부근에 있던 소렌토는 밤새 뿌옇게 먼지를 머금었다. 반찬이 들어있는 가방을 차 뒤편에 기울어지지 않게 고정시키자 비로손 두 손이 자유로워진다. 차에 올라탄 연우는 고요에 잠긴 백양리역을 뒤로하고 강변 카페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카페에 도착해 가방에서 반찬통들을 꺼내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배가 슬슬 고파져 찰순대만 레인지에 데운 후 맛소금과 깨소금을 곁들여 먹었다. 찰순대로 속이 든든해지자 엄마의 안목이 새삼 경탄스럽다. 잠깐 동안 한숨 돌리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아침부터 흐렸던 날씨가 기세를 모으더니 강변에는 더욱 짙은 먹구름을 몰고 왔다.
이번 서울행에서 연우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변으로 이사를 염두하고 있다는 엄마의 말도 놀랐지만, 혜인이 둘만의 아지트였던 좁은 골목길 카페를 혼자서 찾았다거나 부모네가 운영하는 식당을 4년 만에 방문한 것도 의외였다. 돌이켜보면 엄마와 혜인은 같은 부류였는지 그녀가 대학생 신분일 때부터 두 사람은 잘 통했다. 혜인은 엄마가 해준 국밥을 좋아했고, 엄마는 숫기 없는 아들보다 또박또박 말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혜인을 딸처럼 예뻐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는 지나간 옛일이었고 혜인이도 세월의 부침을 겪었다. 그 변화의 시간 속에서 골목길 카페와 엄마의 국밥집은 그녀의 삶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평소의 패턴에서 벗어난 행적을 그녀 스스로 보였다. 혜인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지금은 도저히 감잡을 수 없다. 혹시 그녀가 사라진 일과 연관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없었다.
이때 잠잠했던 휴대폰 벨소리가 세상을 향해 울리기 시작했다.
"박연우 씨 휴대폰입니까?"
휴대폰 속에서 얼음 같은 음성이 차갑게 들려왔다.
"맞습니다. 누구시죠?"
"종로경찰서 권도혁 형사입니다."
연우는 올게 왔나 싶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요?"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지금 통화 괜찮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안혜인 씨 아시죠? 예전에 두 분이 사귀었다고 하던데..."
"그런데요?"
"안혜인 씨가 지금 실종 상태입니다. 혹시 소식은 들었는지요?"
도혁은 혜인의 실종을 기정사실화 한 듯 단숨에 말했고, 연우한텐 일말의 기대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네, 친구한테서 들었어요. 그런데 실종이 맞긴 하나요? 스스로 잠적했다거나 하는 가능성은 없나요?"
"처음엔 그것도 염두했지만 이제 실종에 무게를 두고 있어요. 상황이 점점 안 좋게 가는 거죠. 최근에 안혜인 씨를 만나거나 통화를 나눴던 적은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왜 그러시죠?"
"의례적 절차입니다. 안혜인 씨 남자친구부터 시작해서 지인들한테도 하는 질문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도혁은 상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기계적인 답변을 늘어놓았다.
"안혜인 씨와 마지막으로 만났거나 연락했던 때는 언젠지 기억하시나요?"
"4년쯤 된 것 같습니다."
"호, 그런가요. 제가 알기론 두 분이 꽤 오랫동안 사귄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에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연우는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였다. 분명히 어떤 작용이 있어 두 사람이 갈라섰는데 서로 이별을 선언했는지, 아니 그런 발언이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글쎄요, 그냥 서로가 조금씩 마음에서 멀어졌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네요."
"그런가요. 헤어질 때 서로 다투거나 감정 상한 일은 없었고요?"
"상실감은 있었습니다."
도혁은 상대방 진술의 허점을 찾기 위해 바늘로 여기저기 콕콕 찌르는 창이었다. 허술한 답변이 보이면 인정사정없이 물고 뜯을 하이에나의 날카로운 이빨은 숨겨둔 채. 반면에 연우는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간략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무난한 대처였다. 도혁이 숨을 고르더니 기습적으로 마지막 질문을 했다.
"지금 심정이 어떤가요?"
"혜인이가 무사하길 바랄 뿐입니다."
연우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도혁은 다음에 또 연락을 하겠다며 통화를 끊었다. 연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깐 마음은 견딜 수 없도록 착잡해졌다.
3.
오후 4시가 지나자 창밖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선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나뭇잎을 적셨고 나무벤치에서 뒹굴던 잎사귀는 물살에 쓸릴 듯 위태로웠다. 연우는 도혁과 통화에서 몇 가지 사실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혜인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 예전 카페를 찾고 국밥집을 찾고. 행위는 있었지만 그에 대한 해석이 난해해 섣불리 꺼낼 수 없는 얘기들. 자신도 모르는 행적의 의미를 남한테 무작정 떠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다름 아닌 혜인에 관한 일인데.
잠깐 그 시절로 돌아가면 어떨까? 그러면 혜인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될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결국은 그녀와 이별에 관한 보고가 될지도 몰랐다.
연우가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복학하던 해, 이미 영국에서 돌아왔던 혜인이도 같은 해 복학했다. 그녀의 학창생활은 이분법적이다. 아니 변증법적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까? 영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원인이었거나 연우와 캠퍼스커플 됨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전후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학우를 대하는 태도가 개방적으로 변했다는 사실.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아닌 평범한 대학생활을 즐기는 꿈 많은 여대생 이미지도 언뜻언뜻 보였다. 혜인의 변신에 가장 크게 놀랐던 인물은 다름 아닌 준식이었다.
"혜인이가 연우와 캠퍼스커플이라니! 참나, AI가 이세돌을 이겼다는 소식 다음으로 충격 먹었네."
그 해 울긋불긋 단풍이 물드는 10월, 과에서 설악산 MT를 떠났다. 혜인이는 예상을 깨고 대청봉에 올랐는데 그녀의 체력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낙오되지 않고 정상에 올라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 웅장한 산세와 멀리 보이는 푸른빛 동해바다에 감탄하기도 했다.
"MT 따라오길 잘했네. 경이롭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혜인이 대청봉 정상에서 황홀한 표정 속에 혼잣말로 했던 말. 연우는 옆에서 물병을 건네며 지난날 인문대 3층 복도에서 그녀가 보려고 했던 풍경을 잠깐 떠올렸다. 동시에 학과 MT를 가자고 설득한 게 잘했다고 생각했다. 당시 혜인의 행동반경엔 엄마의 국밥집도 포함되었다. 우연히 국밥을 맛보고 반했는지 시간이 허용하는 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영국 유학생활에서 먹었던 튀김감자와 밀가루로 만든 구운 빵에 질린 상태였는데 엄마의 식당에서 국밥의 신세계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또 와도 되죠?"
"그렇게 맛있어?"
"그럼요. 고기는 쫄깃하고 혀끝에 붙는 짭짤한 감칠맛이 너무 좋아요."
"에고 저 야무지게 말하는 것 보게. 하여튼 연우야, 이 엄마가 널 달리 봤다."
엄마의 말에 연우가 영문을 몰라하자,
"혜인이한테 잘해!"
이번엔 혜인이를 보고,
"혜인아, 연우가 속상하게 굴면 언제든 말해. 대신 혼내줄 테니까!"
"네, 어머니."
혜인은 재미있어했고, 연우는 어이없어했다.
두 사람은 연우가 졸업할 때까지 캠퍼스커플을 이어갔다. 틈틈이 카페를, 국밥집을, 둘만의 여행지를 찾아 떠났으며 4학년이 되자 도서관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보세요! 백수 되고 싶어요!"
도서관에서 연우가 나태하거나 졸거나 하면 어김없이 경고장이 귓전을 때렸다. 엄마가 대신 혼낼 필요조차 없었다. 혜인은 엄마 말마따나 딱 부러지는 성격이어서 목표가 정해지면 한눈파는 꼴을 못 봤다. 그 해 연우의 목표는 취업이었고 혜인의 당근과 채찍이 번갈아 날아들었다. 당근 보다 채찍이 많았던 나날이었지만, 당근이 있던 날은 도서관 옆 희미한 전등불빛 아래서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선물처럼 받기도 했다.
"대견하다 아들!"
연우는 졸업을 앞두고 이름이 제법 알려진 기업 인사부에 취업했다. 최종 합격 연락을 받던 날 엄마는 동네잔치라도 벌일 듯 기뻐했고 혜인은 옆에서 흐뭇하게 지켜봤다. 연우는 그녀를 보면서 '덕분이야' 말하고 싶었지만 부모가 보는 앞이라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혜인이는 계속 공부하는 거야?"
그날 저녁 연우와 혜인, 연우네 부모가 취업 축하파티를 하던 자리에서 엄마가 말했다. 시내 음식점 별도 공간에 마련된 테이블에는 갈비찜, 샐러드, 잡채와 나물 반찬 그리고 혜인이 특별히 준비했던 케이크가 있었다.
"네, 당분간 그러기로 했어요."
"그렇구나! 나중에 교수님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대학 문턱도 안 넘은 엄마의 통찰력. 비록 툭 건드린 말투였지만 엄마의 눈빛은 확신하고 있었다. 혜인이는 취업 대신에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석사에 이어 박사과정을 밟고 최종적으로 교수가 되고자 결심한 듯 보였다.
그날의 축하자리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할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디저트로 나온 과일모둠이 입맛을 돋웠고, 혜인이 사 왔던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각자의 앞 접시에 먹기 좋게 담겨 있었다. 연우는 취업을 했고, 혜인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부모네는 젊은 커플의 미래를 밝혀주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연우와 혜인, 부모네가 한 자리에서 정답게 대화하며 웃음꽃을 피운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