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 로물루스' & '글래디에이터 2'에서 로마 신화의 의미는.
할리우드 대표 거장 리들리 스콧은 여전히 배고프다.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듯, 백전노장은 해마다 신작을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리들리 스콧은 두 편의 영화 엔딩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SF호러 장르의 시초이자 1편 감독을 맡았던 '에이리언' 시리즈의 스핀오프 '에이리언: 로물루스' 제작에 참여했고, 11월에는 24년 만에 속편으로 컴백한 '글래디에이터 2' 메가폰을 잡았다.
전혀 다른 장르의 두 작품인데 하나의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와 '글래디에이터 2' 모두 로마 건국 신화를 영화 소재로 삼은 것. 그동안 연출작들을 통해 진보적인 성향과 메시지를 전달해 온 리들리 스콧이었기에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왜 로마 건국 신화를 소환했을까?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로마 건국 신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의 건국자로 알려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권력을 뺏길까 두려워한 아물리우스 왕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티베리스 강에 버려졌으나 지나가던 암컷 늑대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암컷 늑대의 젖을 먹으며 자랐고, 이후 양치기 손에 발견돼 양치기로 자랐다.
훗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쌍둥이는 세력을 키워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도시 건설을 둘러싸고 형제간 반목하게 됐고, 이는 전쟁으로 번졌다. 이 전쟁에서 동생 레무스가 사망하고, 형 로물루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 도시 이름을 로마로 명명하며 초대 국왕이 됐다.
왕국을 건설했지만 주민 수가 부족했다. 로물루스는 도망자,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며 남성 수를 늘렸으나, 여성의 숫자는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국가들에게 혼인관계를 맺자고 청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이에 로물루스는 이웃의 사비니인들을 초대해 여성들을 납치하고 나머지를 추방시켰다. 이는 로마-사비니 전쟁으로 이어졌고, 사비니 여성들이 직접 중재에 나서면서 휴전을 맺고 양 국가는 공동 통치체제를 갖췄다
(※ 로마 건국 신화는 다른 신화들처럼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으니, 참고하길 바랍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의 로마 건국 신화: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이거나 힘을 합치는 형제
이제 '에이리언: 로물루스'(이하 1.5편) 이야기를 해보겠다. 1.5편은 연출을 맡은 페데 알바레즈 감독이 '에이리언' 1편을 만든 리들리 스콧을 찾아가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스토리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로마 건국 신화를 스토리라인 기반으로 삼았다.
1.5편이 제작되기 앞서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에서 로마 신화를 차용한 바 있다. '에이리언' 세계관에서 대립하는 인류와 에이리언은 창조주(엔지니어)에 의해 탄생한 피조물이며, 이를 한 배에서 같이 태어난 로물루스&레무스 형제로 빗댄 것. 쌍둥이 형제가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듯, 두 종족은 생존, 최상위 포식자 자리를 위해 서로를 죽이며 경쟁하는 관계가 됐다. 그래서 '에이리언' 시리즈 내내 두 종족의 혈투가 이어진다.
1.5편에선 쌍둥이에게 젖을 물린 늑대의 존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우주 거대기업 웨이랜드 유타니. 이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데 주요 원동력인 자본과 힘을 앞세워 인간을 통제하고 동시에 케인의 자식(인간형 에이리언)이 화석화된 고치를 회수해 에이리언 유전자를 연구개발했다. 웨이랜드 유타니가 키워낸 쌍둥이 형제들은 침범해선 안될 영역을 넘어버리면서 처절한 생존싸움을 벌인다.
여기에 웨이랜드는 자신들이 그토록 원했던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합성체(오프스프링)까지 등판시키며 또 다른 쌍둥이 형제(인간-오프스프링 혹은 에이리언-오프스프링)를 양산했다. 이들의 유혈이 낭자하는 골육상쟁으로 인해 르네상스 우주기지는 참혹한 현장으로 변모한다.
동시에 1.5편의 주인공 인간 레인(케일리 스페이니)-합성인간 앤디(데이비드 존슨)의 관계성을 통해 로물루스-레무스 형제 신화를 뒤집는다. 영화 중간에 서로를 배신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이들은 오래전부터 이어온 끈끈한 유대를 재확인한 뒤 힘을 합쳐 에이리언들의 위협에서 벗어나 '낙원' 이바가로 향하는 엔딩을 맞이한다. 상대방을 희생하여 경쟁에 우위를 점하는 살해 대신 공존이라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냈다.
'글래디에이터 2'의 로마 건국 신화: 형제의 갈등과 봉합, 그리고 정당성 확보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 시리즈는 실제 인물과 역사를 일부 차용했을 뿐 자신의 상상으로 만든 '고대 로마 판타지'다. 1200년 간 존속한 로마의 역사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3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선택한 건, 21세기 오늘날과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콤모두스(호아킨 피닉스, 1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게타(조셉 퀸) 형제는 국가운영을 뒷전으로 두고 유흥에 빠졌으며, 대규모 검투 대회를 열어 군중의 시선을 콜로세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유희로 돌려놨다. 이 여파로 로마는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어 나라 전체가 피폐해졌는데, 마치 대중매체, 미디어를 장악하여 3S 정책처럼 자극적인 오락거리로 국민들을 좌지우지한 현대 정치 엘리트들과 맞닿아있다. 이렇게 보면, 리들리 스콧은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황혼에 접어든 현대 민주주의와 대중의 속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일개 검투사인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1편)-루시우스(폴 메스칼, 2편) 부자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주최자(황제)에게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 이들은 단순히 콜로세움의 스타를 넘어 로마 공화정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SPQR'(로마의 원로원과 시민, 로마 공화정을 상징함)의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다. 리들리 스콧이 무리수를 두는 역사왜곡까지 감행한 건, 영웅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너진 대중민주주의를 바로잡고 올바른 공론이 회복됐으면 하는 자신의 이상주의가 반영된 것이다.
그중 카라칼라-게타 형제는 로물루스-레무스 형제와 오버랩됐다. 형제가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며 국가를 다스리긴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카라칼라는 게타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 의심을 키웠다. 결국 그는 동생을 살해하게 되는데, 서로 힘을 합쳤다가 생존 경쟁 때문에 동생 레무스를 공격하여 죽인 형 로물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2편 후반부 시퀀스인 새 황제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가 이끄는 황실 근위대와 루시우스를 따르는 군단이 일촉즉발 대치 하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 로마의 상징인 카피톨리노 동상이 설치된 성문을 경계로 양 군단이 갈라서있는데, 뜻을 함께 하던 같은 편이었다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전쟁을 벌이게 된 쌍둥이 형제를 연상케 했다.
여기에 루시우스와 마크리누스 1대 1 듀얼 결투는 권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택한 형제의 혈전이었고, 결국 루시우스가 갈등을 끝내고 하나의 사회를 통합하는 레물루스가 되었다. 이렇게 리들리 스콧은 로마 건국 신화를 하나의 장치로 활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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