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의 쇠맛 한 길 인생이 결국 통했다
"한 우물만 파면 빠져 죽는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는 한 분야에만 매진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보다 여러 분야를 아우르며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들이 각광받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에스파(aespa)의 행보는 눈에 띈다. 다양한 장르와 콘셉트, 혹은 대중성이 강한 이지 리스닝으로 접근하는 다른 아이돌과는 다르게, 데뷔 이래 지독하게 쇠맛 길만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파는 출발점부터 기존 아이돌 그룹과 달랐다. 2020년 10월 이수만 前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미래 세상은 셀러브리티와 A.I.의 세상이 될 것"이라며 미래 엔터테인먼트 세상의 핵심 가치이자 비전을 담은 SMCU(SM Culture Universe) 프로젝트를 공개했고, 이 미래지향적인 프로젝트를 세계관으로 기반삼아 걸그룹 에스파를 론칭했다.
아이돌에게 세계관을 부여하는 방식은 3, 4세대 아이돌(주로 보이그룹)이 많이 사용해왔다. 그룹 혹은 아티스트에게 하나의 서사를 만든 뒤, 무한한 상상력으로 여러가지 스토리를 덧대 독창성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팬덤과 소통하며 확장해 나간다. 에스파의 선배 엑소(EXO)가 처음 시도했고, 방탄소년단은 세계관 콘셉트의 성공 사례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에스파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현실과 가상세계의 융합'이라는 모토 하에 멤버마다 가상의 아바타 ae가 연결되어 있고, 조력자 나비스(naevis)의 도움을 받아 가상 세계 광야(KWANGYA)에서 악당 블랙 맘바(Black Mamba)에 맞선다는 미래지향적인 콘셉트를 카우만(CAWMAN : Cartoon, Animation, Web-toon, Motion Graphic, Avatar, Novel)이라는 장르에 맞춰 스토리텔링한다. SMP(SM Music Performance, 강렬한 멜로디와 혼돈 속 자아를 찾아가는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 위주의 댄스곡) 기반의 콘셉추얼하고 강렬한 음악 스타일을 추구했다. 엔터계에서 늘 먼저 시도해왔던 SM의 또 다른 최초이자 실험이었다.
SM 선배들처럼 에스파 또한 데뷔하자마자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데뷔곡 'Black Mamba'부터 영화 '분노의 질주: 홉스&쇼'의 동명 OST를 리메이크한 곡이자 2021년 가요계를 평정한 'Next Level', 'Savage', 그리고 'Girls'까지 이른바 '쇠맛(혀끝에 금속을 가져다 댄 것 같은 강렬하고 쨍한 노래 스타일)' 장르를 선보이며 히트쳤다.
문제는 에스파의 SMCU가 대중이 다가가기엔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음악만 즐기고픈 대다수 리스너들에게 메타버스와 엔터테인먼트의 결합체는 너무나 복잡한 구조였고, 에스파의 음악과의 연결성도 부족했다. ae 멤버들은 세기말에 등장했다 사라진 사이버가수 아담처럼 이질감이 느껴졌다. 때마침 K-POP 트렌드가 거창한 세계관을 버리고 이지 리스닝을 앞세워 대중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에스파는 2023년 초 위기를 맞았다. 소속사의 경영권 분쟁 여파로 에스파의 세계관 SMCU를 만든 장본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떠나게 된 것. 이로인해 SMCU는 구심점을 잃었고, 이를 기반으로 활동해온 에스파 또한 치명타를 맞으며 변화가 필요했다.
에스파는 그룹의 정체성인 SMCU와 쇠맛을 버리기보단 자신들의 색깔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조합 찾기에 나섰다. 미니 3집 'MY WORLD' 수록곡 'Spicy', 'Thirsty' 등 청량함과 보컬의 매력을 강조하는 이지 리스닝을 시도하는가 하면, 'Better Things'처럼 영미권 하이틴 팝도 소화했다. 이어 미니 4집 'Drama'을 통해 SM의 상징인 SMP 장르를 심화단계로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끊임없이 실험한 끝에 최적의 컬러를 찾았으니, "Su, su, su, Supernova"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정규 1집 'Armageddon'의 선공개곡이자 더블 타이틀곡 'Supernova'다.
'Supernova'는 일렉트로팝과 힙합이 결합된 에스파표 쇠맛을 베이스 삼아 잘게 쪼갠 보컬, 독특하고 깔끔하게 곡 구성을 더해 리스너들의 귀를 끊임없이 두들긴다. 또한 뮤직비디오는 미래지향적인 SMCU를 재치있게 표현했고, 에스파의 세계관을 멀티버스(다중 우주 세계관)로 방향 잡으면서 팬덤을 넘어 진입장벽을 느꼈던 대중까지 포용했다. 여기에 음원을 삼킨 듯한 에스파의 탄탄한 라이브 영상들까지 퍼져나가면서 곡명대로 '초신성'처럼 폭발했다.
뒤이어 선보인 또 다른 타이틀곡 'Armageddon' 또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기계음이 강했던 'Supernova'와 달리 힙합 성향의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우며 세기말과 사이버 펑크 감성의 접목을 시도했다. 카리나의 표현을 빌려 날카로운 쇠맛에 텁텁한 '흙맛'을 추가했다. 신기하게도 전혀 다른 성향의 두 곡이 좋은 합을 이루게 되면서 시너지를 발휘했고, 이를 발판삼아 에스파는 걸그룹 경쟁에서 독보적 원톱으로 치고 나올 수 있었다.
쇠맛 강했던 우주여행의 인기가 채 식기도 전에 에스파는 지난 10월 미니 5집 'Whiplash'를 발표했다. 앨범명과 동명인 타이틀곡 'Whiplash'는 유럽 클럽 DJ 스타일이 물씬 묻어나는 하우스와 테크노를 비벼 차가운 쇠맛의 농도를 끌어올리는데 채찍질한다. 멜트미러 감독이 참여한 뮤직비디오는 '에스파는 쇠일러문이다'라는 걸 한 번 더 각인시키는 듯이 깔끔한 쇠 맛 한 상을 차려낸다. 정규 1집 만큼 센세이션은 아니지만, 에스파의 'Whiplash'도 대성공이다. 이들의 5연속 밀리언셀러 달성은 자연스레 따라올 수 밖에.
앞으로 에스파가 어떤 행보를 보여줄지는 감히 예측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꺾이지 않고 지독하게 쇠맛 한 우물을 판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2024년 K-POP에서 에스파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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