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불호 갈려도 '어쩔수가없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리뷰

by J Hyun

※ 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디 블랙코미디는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다. 웃음을 유발함과 동시에 불편함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대놓고 건드리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표 블랙 코미디 영화인 '어쩔수가없다'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영화의 일부 설정과 장치들이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이나 평단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는데, 박찬욱 감독은 이러한 극명한 반응을 유도한 것처럼 보인다. 이번에도 '박찬욱다웠다'.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모든 걸 다 이뤘다고 자신의 삶의 만족해하던 25년 경력 제지 전문가 유만수(이병헌)이 하루아침에 해고당한 뒤, 재취업하기 위해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는 아내 이미리(손예진)와 자녀들에게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했으나, 1년이 지나도 재취업은커녕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한평생 제지업 한 길만 팠던 만수는 본인이 지원한 포지션의 거짓 공고를 내어 이력서를 받는다. 자신보다 합격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구범모(이성민), 고시조(차승원) 등을 차례로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제지에 근무하는 박선출(박희순)마저 제거 대상으로 삼는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파피루스의 자리에 지원할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다. 아내와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던 그가 선택한 방법이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을 본 이들이라면 이미 알아챘겠지만, '어쩔수가없다'는 박 감독의 장편 11편과 비교했을 때 가장 직설적이고 진입장벽이 낮다.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정리해고된 만수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잠재적 취업 경쟁자를 제거해가는 스토리를 펼쳐 보이면서 동시이 어쩔 수 없는 사회 구조 변화에 노동자가 쉽게 내몰릴 수 있는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자본주의 논리가 개인 윤리를 얼마나 간단하게 무너뜨리는지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이 과정에서 소리를 통해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노동자를 연민하고 조소한다. 정리해고당할 때 목이 터져라 외치는 만수의 목소리는 공장 기계 소음에 묻혔고, 만수와 범모가 서로에게 울분을 쏟아낼 때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에 뒤엉켜 알아들을 수 없다. 아무도 시조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공허하다고 말하는 선출의 입은 만수에 의해 막혀버린다. 모든 환란이 지나가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만수는 입과 귀를 닫는다.


collage2.jpg


동시에 유만수를 통해 옛날 옛적부터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가부장제도의 민낯을 끄집어낸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가족을 위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극단을 선택하는 만수에 조금이라도 감정이입하게끔 여지를 주지 않고 건조한 시선으로 그를 관찰하며 과대평가된 남성을 나락에 빠뜨린다. 만수는 남자이자 남편, 아버지로서 집과 가족을 지켜냈다고 착각하나, 이는 모든 비밀을 알고 같이 '나쁜 일'에 동참한 미리 덕분에 가능했고 그녀 덕분에 망상이 현실이 된 셈이다. 유만수를 비롯한 영화 속 다른 중년 남성캐릭터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하면서 전통적인 남성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작인 '헤어질 결심'과는 대조적이다.


현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소재도 은연중에 부각한다. 만수가 자신의 자리 하나를 되찾기 위해 수 천 km를 움직여가며 난장판을 치는 동안 인공지능(AI) 기술은 조용히 급부상하며 기존 노동력 대부분은 대체하고 있었다. 그가 새롭게 취직한 파피루스 공장에서도 이미 AI가 제지 공장 노동자들을 밀어내고, 대부분 노동력을 소화하질 않았나. 어렵게 쟁취한 그 자리를 다시 내줘야 할 수도 있고, 이제 만수가 죽여서 없앨 수도 없다.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여러 번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작품이나, 국내 관객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린다. 앞서 언급했던 블랙 코미디의 장르적 특징 때문도 있으나, 현실에서 갖춘 다양한 해결책을 배제하고 제로섬 게임을 강요하는 점, 일을 저지르는 만수의 동기에 대한 논리적 개연성에서 지적받는다. 힘든 상황에 내몰린 가장이라는 설정만으로는 극단적 선택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러한 호불호 논쟁을 일부러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인 '헤어질 결심'과 비교했을 때, 분명 아쉬운 점은 있다. '오발탄'에서 가져온 듯한 치통과 권총 모티브부터 장어, 분재, 뱀, 고추 등 상징과 은유들이 넘쳐나는데 조금 투머치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이미리 역의 손예진의 쓰임새나 분량도 생각만큼 크진 않다는 것도 약점. 원작이나 전반적인 내용을 고려한다면, 이미리의 존재감을 키울 수 없었던 상황이긴 하다만, 손예진의 활약상을 기대한 이들이라면 실망했을 수도 있다. 물론 손예진은 자기가 맡은 몫은 100% 훌륭히 소화해냈다.


이것저것 다 선보이는 '어쩔수가없다'가 높은 흡인력을 갖춘 건 영화의 의도와 방향성에 맞춰 충실히 수행한 배우들의 연기 차력쇼 덕분이다. 특히, 이성민과 염혜란은 다른 작품에서도 미친 존재감을 자랑해왔던 배우들인 건 모두가 다 알지만, 박찬욱 감독을 만나면서 다시 한번 얼굴을 갈아끼우며 인생캐릭터를 갱신한다. 박희순, 차승원은 적은 분량임에도 이야기의 중심축을 잘 잡았다. 그리고 이들과 다양한 관계성을 만들어내는 이병헌은 더 이상 수식어가 필요 없을 만큼, 경지를 넘어선 연기력으로 희극과 비극 그 중간을 그은 선을 줄타기하듯 뽐낸다.


★★★★


collage.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