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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랑 Feb 13. 2023

우리동네 할머니 공동체

지역의 오랜 시간을 담고 있는 나의 이웃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에너지 수급난이 이어지면서 많은 국가에서 난방비는 새로운 고민으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도 예외 없이 마주한 고민에 요금 인상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 밖을 나서지 않아도 몸이 떨리는 강추위에 난방비에 대한 고민을 순간 잊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난방비 폭탄 소식과 함께 입춘을 맞이했다. ‘입춘대길’ 정갈한 글자가 반가운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가 되자마자 고지서에 적힌 기다란 숫자가 무색할 만큼 땅 위에 모든 것이 빠르게 녹아간다. 그중 하나가 00로를 드문드문 채우고 있는 벤치 의자이다.

 동네의 하나뿐인 산으로 이어지는 00로는 길게 쭉 뻗어 있는 길로 사람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의 산책길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이기도 하다. 이곳은 양쪽으로 기둥이 굵은 벚꽃 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특히 해가 길어지는 시기에 나무 틈으로 설치된 벤치 의자는 만석이다.

 겨우내 비워져 있던 벤치 의자에 난방비 부담이 커질수록 00로가 그리웠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중 의자가 모자란 듯 서로에게 밀착해서 앉아 이야기하는 할머니들 모습이 당연 돋보였다. 소곤소곤 할머니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어보았다.


 - 따로 없고 점심 먹고 슬슬 나와 앉아 있으면 이렇게 모여져요. 집에 있어봐야 재밌지도 않은 티브이나 붙잡고 있지. 날씨가 너무 이상하지 않으면 매일 이 시간에 나와요.

 - 그런데 오늘은 해가 들어갔다 나왔다 오락가락하네. 사람은 하루 두 시간은 해를 맞아야 한다고 했는데.

 - 그래도 요즘 해가 길어졌어. 5시만 돼도 어둡더니 이제 안 그래. 이제 해가 길어질 일만 남았어. 날이 더 따뜻해지면 길에 사람이 더 많아질 거예요.


 같은 건물에서 거주하고 있는 할머니들은 서로가 오래된 이웃이다. 오후 1시 30분, 말하지 않아도 매일 해가 높은 시간에 나와 그날의 계절을 느끼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지나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놓치지 않는다.


 - 이 길에 지나가는 노인은 거의 다 알아요. 워낙 이곳에 오래 살았어요. 결혼하고 계속 여기에 있었으니까. 시장에 가도, 노인정에 가도 다 만나니까 아는 얼굴들이지.

 - 옛날에는 앞에 있는 도로가 하천이었어요. 건널 수 있는 다리도 몇 개씩 있었고. 여기 있는 건물들 자리는 밭이었어요. 젖소도 키우고 쑥이랑 냉이도 많아서 그거 캐서 떡이랑 국이랑 많이 해 먹었는데.

 - 맞아. 저기 00 터널도 풀 많은 언덕이었는데. 여기도 많이 변했어. 요즘은 냉이도 하우스에서 난다고 하대. 뿌리가 크다고 하던데. 곧 냉이 많이 넣고 된장국 끓여 먹어야겠어.

 - 그런데 하우스 맛이 덜하지 않아? 나는 하우스에서 관리받은 것보다 아직은 노지에서 나는 게 더 맛있어. 근데 요즘은 하우스 아닌 곳이 없지.

 - 저기 산 아래에 도시텃밭인가 그거 사람들 많이 하더라. 1년에 얼마 내고 한다던데. 쌈 채소나 작은 작물은 해 먹으면 좋겠던데.

 - 그럼! 내가 해서 먹을 수 있으면 좋지. 그 땅 텃밭으로 사용한 지 몇 년 됐는데 사람들이 주말농장처럼 하겠다고 많이 하더라.

 - 근데 나는 젊어서 밭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안 하고 싶어. 그냥 남이 한 거 사 먹는 게 최고지. 그렇지요?


 00동은 인근 동네 두 곳과 함께 도시텃밭을 운영하고 있다. 텃밭 크기에 따라 9.000원에서 30,000원까지 가격이 다양하다. 1년 사용비로 합리적인 가격 덕분인지 매년 이용자가 늘어 경쟁이 치열하다.

 매끄러운 도로와 잘 관리된 건물로 채워진 이곳이 물이 흐르고 흙밭이었다니 상상이 어렵다. 할머니 집 뒤편으로 오래된 건물을 무너트리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작업이 시작된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 참이었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그러면서도 밭이었던 곳에 건물이 서고 그 옆 자투리 공간에 도시텃밭을 운영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다.


 - 여기 벚꽃이 만개하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잎이 나면 그것대로 예쁘고 꽃이 피면 그것대로 예쁘고 꽃이 져서 떨어지면 눈 오는 것 같아 또 좋고.

 - 그렇지. 여기가 다 벚꽃나무여서 어디 안 가도 꽃구경할 수 있지.

 - 꽃 다 지고 나서 잎만 남으면 그늘 만들어 줘서 사람들이 그늘지는 의자만 골라 앉지 않고 골고루 앉아.

 - 해가 강해지면 사람들이 그늘진 곳만 골라 앉아서 앉을 곳이 별로 없어요. 나무에 잎이 빨리 자라야 돼.

 - 맞은편 공원에는 할아버지들만 앉아요. 담배 태우는 사람들이 있어서 연기 때문에 저 쪽은 할아버지만 앉아. 그리고 어떻게 남자랑 여자랑 같이 앉을 수 있겠어. 그래서 저 쪽은 할아버지, 이 쪽은 우리 할머니들이 나눠 앉아요.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남녀칠세부동석’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유교 가르침을 잊지 않는 어른들이다.

 오후 2시 30분, 아까보다 길에 사람과 반려동물로 가득하다. 한 할머니가 점심이 아직이라며 일어난다. 인사 없이 자리를 떠나는데 남아 있는 할머니들도 자연스럽게 하던 말을 이어한다. 잠시 뒤 또 다른 할머니가 빈자리를 채운다.


 - 사람 구경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지. 오늘 여기 사람이 많네!

 - 어서 와요. 요즘 해가 좋아서 다들 나오나 봐. 이렇게 얼굴 보고 좋지.

 - 깨과자 좋아해요? 나는 요즘 이게 그렇게 맛있더라. 같이 먹어요.


 처음 만난 낯선 이에게 누구인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간식을 한 움큼 내어준다. 오고 가는 시간이 자유로운 곳에는 누가 와도 대화가 이어진다. 다시 벤치 의자에는 네 명, 옆으로 한 명이 나란히 앉아 느린 이야기를 나눈다.


 같은 건물에 사는 할머니들은 집 안과 밖 상관없이 ’오늘 누구는 안 나왔네, 요즘 잘 안 보여‘ 같이 소란스럽지 않게 서로를 생각한다. 이웃이 없는 아파트 단지에서 어느 집에 누가 있는지 안다는 것은 꽤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혼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할머니들은 ‘같이 살려면 서로 해줘야 해’라고 입모아 말한다. 점점 더 젊어지는 지역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같이 살아가기 위한 할머니들의 관심 때문이 아닐까. 각자도생을 온몸으로 말하는 요즘이라 할머니들의 느슨하지만 단단한 공동체 발견이 어느 때보다 더욱 반갑다.



*오랜 시간 한 동네에서 거주하고 계신 할머니들입니다. 같은 길을 오며 가며 매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궁금하여 할머니들 수다에 동참한 시간을 글로 나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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