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얻은 단서로
12월 31일에서 1월 1일, 해가 바뀐다. 새로운 해를 기념하기 위해 오전 12시가 되기까지 숫자 세는 행위를 한다.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특별할 것 없는 성탄절처럼 집과 일터를 반복하는 생을 지속하다 보니 넘어가는 해조차도 그러하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것처럼.
익숙한 시간 속 감흥이 사라질 때, 현실과 도전 사이에서 오래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는 익숙함과 새로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인데, 각박한 세상에서 과감히 도전을 택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절대 예상할 수 없었던 전염병이 고민에 더해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더욱 꺼낼 수 없게 된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새로움을 찾아가는 사람인 걸까. 결국 마스크 제한이 느슨해질 때쯤 익숙한 곳을 떠났다. 전염병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실현한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많은 질문을 모른 척하고 몸을 움직일 때, ‘드디어 간다’는 시원한 마음이 전부가 아니었다. 고민'만' 오래 하면 그 시간에 질려 에라 모르겠다'만' 남게 되는데, 이 마음으로 움직일 때 장단점이 있다. 예상치 못한 한발 떼기와 무계획에서 오는 불안감. 지금 생각하면 무계획에서 오는 불안감이 동력이 되어 한발 뗄 수 있게 만들었으니. 그때의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낯선 것을 마주할 때 불안을 잠재워주는 것은 경험이 만든 단서다. 이는 모르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데, 여기가 맞는지 걸음이 멈춰질 때마다 가도 되는 길인지 뒤돌아 확인할 수 있다. 이정표를 보고 걷다 보면 경험과 단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의 곁을 든든히 지켜줄 것이다. 나를 지키는 것은 나뿐이다. 나를 지켜줄 든든한 단서를 모으자.
작년의 나에게 박수 치는 지금의 나처럼, 얼마의 시간이 지나 지금의 나에게 박수 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오늘을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흘러가게 두지 말고 손 끝에 힘을 주어 단단히 붙잡고 싶다. '그저 오늘을 살자'라고 말하는 브릿마리처럼. 생생하게 살아 낸 오늘이 내일의 이정표가 된다. 그러니 난 그저 오늘을 살아내면 된다.